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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죄의 문제서 벗어나게 하는 길잡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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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호 28면

『존 버니언 전작집』(1874) 중에서 『천로역정』에 수록된 A B 월터의 판화 ‘순례자의 꿈’.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에 도전하는 책들이 꽤 있다. 기독교 전통 내에서만 따져본다면, 가톨릭에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이, 개신교에는 『천로역정』이 있다.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선교지에 도착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성경 번역이다. 그들은 문자가 없는 수많은 부족 언어를 역사상 처음으로 표기했다. 성경 다음에는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순례자의 전진(前進)』이 번역 1순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말 『텬로력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대조선 개국 504년 을미년’ ‘구세주 강생 1895년’이었다.

『천로역정』의 한글판 표지(1895).

땜장이 출신 목사의 옥중 저작
『천로역정』의 저자는 존 버니언(1628~1688)이다. 『천로역정』(1678, 1684)은 그의 생전에 프랑스어·네덜란드어로 번역됐으며 현재 200개 이상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 종교서뿐만 아니라 문학서로도 이름이 드높다.
60여 편의 작품을 남긴 버니언은 출신이 미천했다. 영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중에는 전도사·작가·목사가 됐지만 원래 직업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땜장이(tinker)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땜장이라는 직업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땜장이는 냄비·주전자·솥에 난 구멍을 때워 다시 쓸 수 있게 했다. 버니언이 살았던 영국에서도 금속 조리 기구에 구멍이 나면 버리고 새로 사는 게 아니라 고쳐 썼다.

버니언은 읽고 쓰는 것만 배우고 학교를 중퇴했다.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장가 들어 살림을 차릴 때도 ‘숟가락, 젓가락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다. 버니언은 두 번 결혼했다. 시집올 때 귀중한 책을 가져온 제갈공명의 아내 황씨 부인처럼 버니언의 첫째 아내는 두 권의 신앙서를 ‘지참금(dowry)’으로 가져왔다. 버니언이 훗날 종교 작가로서 우뚝 서는 데 큰 도움이 된 책들이다.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난 버니언은 젊은 날의 방황 끝에 청교도가 됐다. 수년간 점진적으로 이뤄진 그의 회심은 회중교회(Congressional Church)에 가까운 침례교에서 달성됐다. 1653년 그는 침례교에 귀의한다. 신학적으로는 칼뱅주의자였다. 버니언의 신앙은 국가 종교인 성공회 신앙과 충돌했다.

『천로역정』이 탄생한 시대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주 뜨거운 시대였다. ‘공화제냐 군주제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국교회인 성공회가 가톨릭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대륙의 개신교 운동과 더 가까워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배경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버니언 또한 1644년 영국 내전에 참전했다.

영국에서 정치는 왕정의 점진적인 민주화, 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절충의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원래 성공회 내부의 운동이기도 했던 청교도주의는 성공회 바깥의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실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비(非)국교도들을 탄압했다. 버니언은 1660년 전도사 활동을 하다 투옥돼 1672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허가 없이 전도를 했다는 게 죄명이었다. ‘다시는 무허가 전도를 안 하겠다’고 하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거절했다.

버니언은 옥 속에 갇힌 몸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레이스를 만들었다. 『천로역정』도 집필했다. 당시 영국의 감옥은 꽤 ‘선진적’이었다. 집필·생업·외출이 가능했다. ‘버니언 주교(Bishop Bunyan)’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해진 그를 회유하고자 왕실은 ‘감투’를 제의하기도 했지만 고집불통이라 거절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여정이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는 인생은 여정 중에서도 ‘순례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나라에서 신(神)의 나라로 나아가는 게 기독교적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멸망의 도시에서 천상의 도시로
『천로역정』은 우화 소설이다. 신앙을 돕거나 저해하는 인간 유형이나 개념들이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버니언의 꿈에 등장한 크리스천(Christian·기독교 신자)이 주인공이다. 크리스천은 반대를 무릅쓰고 식구들을 떠난다. 그가 살고 있던 ‘멸망의 도시(City of Destruction)’에서 ‘천상의 도시(Celestial City)’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 국가들이 형성하는 세계였다. 로마제국도 로마라는 도시에서 시작됐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하나님의 나라’ 또한 도시로 이해됐다.

크리스천의 멘토는 ‘복음 전도자(Evangelist)’다. ‘복음 전도자’는 크리스천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등장한다. 순례 여정에서 크리스천은 훼방꾼도 만나고 은인도 만난다. 길동무는 ‘믿음찬(Faithful)’과 ‘희망찬(Hopeful)이다. ‘고집쟁이(Obstinate)’ ‘세상사에 밝은 이(Mr. Worldly Wiseman)’는 훼방꾼이다. ‘분별(Discretion)’ ‘신중(Prudence)’ ‘경건(Piety)’ ‘자애(Charity)’라는 이름의 동정녀들과 ‘지식(Knowledge)’ ‘경험(Experience)’ ‘깨어 있는 이(Watchful)’ ‘성실이(Sincere)’라는 이름의 목동들이 그를 돕는다.『천로역정』 1부(1678)에서 크리스천은 결국 ‘천상의 도시’에 도달한다. 2부(1684)에서는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네 명의 아들도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인류 최초의 여행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서기전 2000~1750년께)의 결말과 달리 『천로역정』의 순례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천로역정』은 ‘셀프힐링(self-healing)’의 교과서 구실도 할 수 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면 당연히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천로역정』이 신앙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분명히 있다. 버니언은 죄의 문제로 고통받는 인간이었다. ‘죄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죄를 두고 버니언은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천로역정』에서 죄의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방안을 제시한다. 요즘 말로 하면 버니언은 ‘자아를 회복’했다.

『천로역정』은 출간되자마자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크리스천은 서부 개척자의 롤 모델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국장에도 버니언이 빈번히 인용된다. 인도 독립운동가 간디의 애독서였던 『천로역정』은 태평천국운동(1850~1864)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예수의 동생’을 자처한 홍수전(洪秀全·1814~1864)의 손에는 성경과 『천로역정』이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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