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모방’의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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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한때 좋아하던 작가의 소설을 무작정 베껴 쓴 적이 있다. 물론 고질적인 게으름이 ‘이런다고 되겠어?’란 냉소를 서둘러 불러내는 바람에, 이 야심 찬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내가 원하는 나’ 사이의 간극은 필부필부들의 인생을 관통하는 스트레스다. 어느 분야에서든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탑재한 재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축복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니까.

 JTBC가 매주 토요일 밤 11시5분 방송하는 ‘히든싱어’는 모창 프로그램이다. 성시경·박정현·조관우·김종서 등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들과 그의 목소리를 감쪽같이 흉내 내는 이들이 장막 뒤에서 함께 노래를 부른다. 방청객과 시청자들은 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진짜 가수가 누구인지를 맞혀야 한다. 음악과 퀴즈가 합쳐진 조금 기발한 오락프로일 뿐인데, 이상하게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하다.

JTBC 주말 예능 ‘히든싱어’의 한 장면.

 모창 가수로 출연한 이들은 대부분 오리지널 가수가, 그리고 그의 노래가 너무 좋아 부르고 또 부르다 “똑같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 사람들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픈, ‘팬심’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을 노래에 담은 것이 감동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자신을 흉내 내는 이들의 순수한 애정은 오리지널 가수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누가 내 노래를 들어줄까 싶어’ 슬럼프를 겪었다는 가수 이수영은 “우리가 당신의 노래를 기다린단 걸 잊지 말라”는 한 출연자의 말에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6회가 방송된 이 프로그램에서 모창 가수가 오리지널 가수를 제치고 최종 우승하는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3명이 남아 겨루는 마지막 라운드는 ‘오리지널리티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어떤 출연자들은, 진짜 가수와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사실상 더 뛰어난 가창력으로 관객들을 놀래키기도 한다. 좋아하는 스타와 같아지고 싶어 쉼 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찾아낸 운 좋은 실력파들이다.

 최근 출간된 주철환 PD의 에세이집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를 읽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북극성을 바라보며 늘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북극성 가까이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북극성 근처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나쁘지 않지만, 그 여행길에서 나를 위해 빛나는 작은 별 하나 발견한다면 더 기쁜 일이 아닐까. 모든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유난히 크고 빛나는 별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