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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남덕우(서강대교수·경제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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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년전 고대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을 때, 중국의 한 철학자는 서방에서 모여온 학자들을 앞에 놓고 유교야말로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있다고 역설하여 청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나 자신은 이 학자의 말을 듣고 과연 그렇구나 하는 공감의 희열을 맛볼 수가 있었다.
논어에는 이런 뜻의 말이 있다.『소인은 서로 같으면서 화하지 않고 신사는 서로 화하면서 같지가 않다』(소인동이부화, 군자화이부동).
우리들 한국사람은 서로 같다는 것을 몹시 중요시한다. 도둑질로부터 의거에 이르기까지 동족, 동지, 동기, 동창, 동북, 동향, 동성, 동본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일이 안 되는 것처럼 믿고있다.
그러나 이처럼「동」을 받드는 우리지만 실제로는 서로 모래알같이 흩어지고 협력에 미숙하다는 자타공시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동이부화」의 본보기라 할까. 우리가 지나치게「동」에 집착하는 자체에 화근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사실 사람이란 필경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부인하거나 혹은 둘의 입장을 하나로 뭉치려고 초조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고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화는 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동을 인정하고 허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공자의 말인 것 같다. 부동을 허하자면 인내와 관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처칠」은 자유의 대가는 인내와 관용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어떠한 친목회에 가입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 우리들은 어떠한 동료의식에 마음이 부풀어올라「일심동체」와「만장일치」를 기약하였다. 그러나 정장 일치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자 회원들은 이것은 결국 동료의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서로 꾸짖었다.
부동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대동에서 소동을 찾기 시작했고, 소동은 또다시 보다 작은 소동으로 갈라졌다. 우리는 동을 구하려다 동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회는 깨어지고 말았다.
우리는「링컨」의 민주주의원리는 배웠지만 공자의 보다 기본적인「화이부동」의 원리는 아직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화이부동」-민주주의의 진수를 이처럼 간명하게 갈파한 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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