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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50) 서재필(상) - 유홍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3세에 장원급제>
서재필(1866∼1951)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권옹호를 위하여 분투한 한말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1866년 11월 28일에 전라도 동복군 하천리(지금의 보성군 문덕면 하천리)에서 군수 서광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872년에 서울로 올라가 외삼촌인 김성근 판서 집에서 6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1879년(13살)에는 가장 어린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한편 그는 김성근 집에 자주 왕래하던 김옥균·서광범 등의 선각적인 청년 귀족들과도 깊이 사귀어 그들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1883년에는 김옥균의 알선으로 일본에 유학 갈 기회를 얻었다. 그는 동경에 있는 육군 유년학교(호산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2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서재필은 고종에게 사관학교를 창설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어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병조참판에 취임>
그는 사관생도를 대표하여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개명 된 청년정객들을 도와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보수적인 수구파의 반대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에 개화파 인사들은 정변을 통해서라도 개혁을 시도 하고자 했다.
1884년 12월에 그들은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일대 정변을 감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갑신정변이다. 그들의 계획은 많은 허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성공하여 14개조에 달하는 개혁안(문벌폐지·인민평등·용관혁파·지조법 개정 등)을 공포했다. 그리고 이재원을 영상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을 맡아서 병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민비의 책동과 청군의 간섭으로 개화당 정부는 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서재필은 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으로 망명>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서·박 양 동지와 헤어져 「필라델피아」로 갔다. 그는 처음에는 얼마간 고생을 해야 했지만 「로버츠」「홀렌백」「스코트」「하트」 등의 미국인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9년, 그가 「라파에트」대학 2학년 때 그를 적극 후원하던 「하트」교수가 사망했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육군군의총감부 도서관 번역관으로 들어가 다시 「조지·워싱턴」대학 외과대학에 입학했다. 1892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모교에 교편을 잡으면서 「가필드」병원에서 「월터·리드」박사와 세균학을 연구했다.
그는 의사로서 1895년에는 미국 철도 우편제도 창설의 공로자인 「조지·암스트롱」대령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고 이름도 「필립·제이슨」(Philip Jaison)으로 바꾸었다.
비록 그가 미국인이 되기는 했지만 고국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두 번째 망명해온 박영효를 만나 고국의 소식을 전해 듣고 가족을 이끌고 단연 귀국했다.
그는 조국을 근대화하는 가장 빠른 길은 신문을 발행하여 대중을 계몽하고 국가의 잘못을 시정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생각한 서재필은 내무대신 유길준의 힘을 빌어 정부로부터 5천 원의 예산을 타내는데 성공하여 그것으로 1896년 4월 7일에 독립 신문을 간행했다. 형식은 순 한글판에 4면만 영어였다. 이는 독자의 범위를 넓히고 대외적인 효과를 위함이었다. <필자=문박·대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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