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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그 준공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우리나라 경제개발사상 전례 없는 모험에 찬 시도였고 또 그만큼 「위구와 기대」가 엇갈렸던 단일 요소공장으로 세계 최대규모의 한국비료 울산공장이 마침내 준공되었다.
64년 8월, 계획이 처음으로 태동했을 때부터 2년 반 남짓, 이제 한국농업 연래의 숙원인 「비료자급」의 전기를 이루고자 생산을 개시한 한국비료는 그러나 너무나도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그동안 겪어야 했고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도 이겨내야만 했다.
정부 스스로가 『하나의 모험적 사업』(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라고 했을 정도로 규모나 투입된 자금, 최신의 화학공정, 또 공기면 에서 허다히 기록을 경신한 이 비료공장이 겪은 그 파란곡절은 『공업화에 따른 하나의 진통이라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깊은 감회가 어린 이날의 준공을 맞아 말했다. 『외국비료의 의존에서 탈피하고 비료자급과 외자의 절약을 기해야겠다』는 오랜 염원 때문에 비료공장 건설은 정부의 1차 5개년 계획의 핵심적 사업 일 수 밖에 없었다.
공동투자에 의한 정부의 「울산비료」 공장 건설 방침이 백지화됨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40개월 전인 64년 8월,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아래 삼성「그룹」에 의한 울산 비료건설계획이 구체화되어 일본의 삼정물산과 차관계약을 체결(64년 8월 20일), 회사설립을 끝냈다(8월 27일).
그 후 자본재 도입허가 및 공장부지 지정, 각의의 사업승인, 국회의 차관지보 동의, 정부 당국의 차관지보 승인과 부지 지정을 거쳐 발족 후 16개월 만인 65년 12월 10일에 착공하기에 이르렀던 것.
『당초에 예정했던 공기는 24개월』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이 공기가 『외화절약, 적기시비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는 긴급한 필요성 때문에 12개월을 단축, 1년 만인 66년 말로 완공하도록 계획이 바꿔졌었다』고 했다. 이 엄청난 과업은 그러나 『각 공정 및 분야를 동시에 「스타트」하는 새 공법을 채택, 24시간 철야 전면작업으로 착실히 진척을 보았다』는 것-.
66년 2월 건설자재의 1차 선적 분이 입하되고 기계 기초, 설치, 배관, 계기공사가 진척되면서 하역사에 기록된 초 중량급 중추시설도 도착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뜻하지 않은 「오트사」 사건으로 한비의 수난은 시작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연말 준공 목표를 석 달 앞두고 마지막 돌관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그 당시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듯 그는 『일시에 허탈감에 빠졌었다』고 쓸쓸히 웃는다. 『연거푸 밀어닥치는 조사단, 자재입하 및 통관절차가 중단되는 통에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 때 설립자 이병철씨는 서울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세계 최대규모의 한비를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그 순조로운 건설을 담당할 수 없음을 절감했으며 이에 미 건설인 채로 이를 국가에 헌납하는 길밖에 없다』는 공개성명을 발표했다.
이씨는 성명발표 후 기자 질문에 답하여 『건설중인 현재로써 바치는 것이며 이에 들어가 있는 나의 재산을 바친다. 내 재산의 3분의 2는 문화재단에 들어가 있고 나머지가 한비에 투자됐는데 한비에 들어간 내자 8내지 9억원 중 내 소유는 얼마 안 된다』고 말했다. <66.9.22>
내각 총사표, 김 재무, 민 법무 해임 등 급진적으로 발전한 「오트사」사건이 유발한 놀라운 소용돌이 속에서 박 대통령은 그러나 『인수여부에 관계없이 건설을 계속토록』 강경히 지시(9.26)했다. 그리고 『건설의 고동이 또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던 것은 그 후 또 얼마가 지나야만 했다』는 것-.
11월 12일 한비 현장을 시찰했던 박 대통령이 『연내 완공을 서둘러 통관절차도 간소화하라』고 지시한 후부터라고 했다. 그 후 석 달, 67년 1월에 시동식을 갖고 그로부터 97일 만인 4월 13일 첫 요소비료의 완제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했을 때 그는 『모두가 울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웠던 건설시기』를 되새기는 눈물인지 『고난 끝의 성공을 기뻐하는 환희의 눈물인지』 자기도 분간할 수 없다면서-. 【울산·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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