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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어느 계층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그 객관적 평가 - 이선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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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내운동과 독립선언> 누구나 짐작하다시피 국내의 3·1운동은 역시 1918년 11월 이후부터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동과 해외 독립운동 지사들의 비밀 연락을 받아 「민족의 지성」인 종교인·교육인 들이 먼저 움직이게 되었다. 1919년에 접어들면서 1월22일 구한말 비극의 군주였던 고종황제가 폭붕하게 되고 그의 사인에 대하여 일제마수의 농간으로 피살되었다는 설까지 전파되니 폭발되는 민족의 비분과 통한은 스스로 이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에는 북접군의 통령으로 그 이름을 떨쳤고 이제는 천도교의 제3세 교주인 손병희가 최린·오세창·권동진 등의 간부와 더불어 좀더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그 중의 최린과 더불어 송진우·최남선·현상윤 등의 교육인·학자들이 참모역을 담당하고 나서 긴밀한 연락을 취한 결과 2월 초순경에는 제 1백5인 사건이래 신교파 기독교의 거성으로 알려진 이승훈을 필두로 양백·함태영·이갑성 등이 호응합작, 불교측에서는 한용운·백용성 등이 가담하여 3대 종교의 간부가 종파의 장벽도 초월하고 민족 자주독립의 대의 앞에 합심 협력하게 되었다. 필요한 거액의 운동자금은 천도교 측이 자진부담하고 용의주도한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된 바 각 교회의 조직망을 통하고 다시 용감한 남녀 학생들의 연결망을 거쳐서 어느덧 각 지방의 지도자들과도 묵계를 맺는가 하면 해외의 독립운동과도 비밀리에 기맥을 상통하여 거사의 시기만을 엿보게 되었다.

<「인산」날의 만세소리>
이같이 하다가 2월 8일에 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이 반포되고,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의 인산(국장)날이 박도하여 전국의 부노들이 대거 서울로 모여들게 되니 일제헌병·경찰의 감시와 사찰도 부쩍 심하게 되었다.
3월 1일 서울 한복판에서 33인을 대표로 내세운 독립선언서가 반포되자 거족적인 항일 독립의 시위운동은 거의 전국을 휩쓸게 되었으니 이 당시 지도자들의 단결력과 비밀엄수의 규율이 그 얼마나 굉장했더냐. 필자의 체험과 기억력을 되새겨 이날부터 전개된 3·1운동의 위대한 모습을 대강이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2월 27일, 28일까지 서울시내 중학 이상의 각급 학교에는 내일(즉 3월 1일) 정오의 오포소리를 신호삼아 학생들 각자의 위치가 그 어느 장소에 처했든지 이유는 묻지 말고 파고다 공원으로 향해 모이라는 비밀 지령이 상급생을 통해 광범하게 전달되어 있었다. 따라서 3월1일 하오1시경에는 파고다 공원이 터지도록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2시 정각이 되니 육모정 에서 돌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뒤미쳐 지축을 잡아 흔드는 『독립만세!』소리와 함께 노도 같은 시위운동이 공원문을 나서 종로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상급생들의 손에서는 언제 준비했던지 수많은 태극기가 휘날리고 하급생들은 모자를 벗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10여개 도시 함께 거사>
인산 구경을 위해 모여든 각지방의 부노들 때문에 종로거리가 빽빽했던 그날인지라 시위 행렬은 수10만 군중을 흡수하여 해가 저물도록 그날의 서울 장안을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파고다공원의 거사와 때를 같이 하여 인사동 태화관 에서는 33인 민족대표들이(두분만 불참하고) 엄숙하게 독립선언서의 선포식을 거행하고 태연자약하게 자신들의 소재와 소행을 경무청에 알려서 조용히 연행 투옥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이 펴놓은 방대한 조직망과 사전계획에는 미동도 없었다. 예정했던 그대로 개성·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원산·함흥 등의 10여개 도시가 동일동시의 똑같은 거사를 단행하였고 다음날 2일 부터는 요원의 불길처럼 남북각지로 확대되었다.

<일의 무차별 살상>
각지방 농촌지구에서 중요도시로 유학왔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제각기 고향으로 달려가서 선후배와 부모형제들을 움직여 또다시 독립만세의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하여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항일 독립의 시위운동이 확대만 되어가니 날이 갈수록 일제 관헌은 독기가 올라 가지고 저희 정규군대까지 각지로 출동시켜 마치 실전장에서 적을 대하는 군대처럼 우리민족에게 임하는 것이라 가슴을 내대고 돌진하는 우리 남녀 학생들을 함부로 살상하고 체포·투옥하고 학교와 교회당은 불질러 버리기도 했다. 전열의 학생들이 쓰러지면 그 뒤를 따라 다가서는 후열의 부형들에게도 무차별의 총탄을 퍼부었다.
한 예를 들면 4월 15일 수원군 제암리에서 그들은 기독교와 천도교의 신도들을 교회당으로 몰아 가두어 놓고 불지른 다음 일제사격을 가하여 탈출하려는 부녀자와 유아들까지 모조리 학살 하고 말았다. 즉사자 39명을 필두로 1천 여명의 중경상자를 내고 3백수10호를 불태웠으며 다시 용주리의 촌락에서는 70세 늙은 부부의 눈앞에서 3자와 3손을 총살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하여 그들은 불과 3개월 동안에 우리동포 7천5백여명을 상해시켰으며 4만6천9백여명을 검거 투옥·고문하고 교회당 47개소 및 2개의 학교와 7백15호의 민가를 불태웠으니 실로 천인공노의 만행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했기에 그 운동에 참가했던 2백 여만명은 물론이요 민족대중이 통틀어 포악무도한 일제 상대의 「영원한 혈전」을 각오하고 「최후일인 최후일각까지」싸우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아가 4월 10일에는-비록 남의 나라 상해에서 이지만-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할 수도 있었으니 정녕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의 모체이었다.

<헌법전문과의 연관성>
기미 3·1독립운동의 모습이 저러했기에 「매캔지」같은 대기자는 이 사실을 가리켜 『세계를 놀래인 위대한 사실』이라 전제하고 일제 총칼 앞에 평화적인 봉기를 감행한 우리민족을 가리켜 「고도의 문화민족」이라 내세우는가 하면 포악무도한 일제를 가리켜「야만」이라고 꾸짖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파이버」같은 이는 한국도 필연「터키」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전쟁의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반드시 세계의 활무대에 등장하고야 말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3·1운동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는 5·4운동이 과연 청년 학도를 앞장세워 터지기도 하였으니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인도의 시성「타고르」가 우리한국을 가리켜『동방의 등불』이라고 드높게 찬양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상과 같은 뚜렷한 사실과 외국인사들의 종합적인 평가를 알고도 「민족의 지성」을 대표하는 종교인·교육인과 청년학도를 떠나서 어찌 3·1운동의 『주역이 농민이었다』고 내세워서 괴상한 계급투쟁의 이론과 혼동할 것인가. 나아가 『저 3·1독립선언서와 그 후의 항일투쟁이 아무상관도 없다』고 강조될 수가 있을 것인가.
더구나 3개 사단의 육군과 1개 함대의 해군과 총계 10만 가까운 헌병·경찰과 보조원과 밀정·재향군인 등등의 막강하고 포악한 병력을 소유한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 적수공권의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폭력 투쟁을 자제하도록 하고 평화적인 봉기를 시도했다고 해서 그 날의 지도자들을 비난할 수가 있을 것인가.
따라서 3·1운동을 저처럼 오판하거나 혹은 근시안의 색안경으로 「실패」였다고만 규정짓고자 애쓰는 논자들에게 필자는 감히 권고하노니 저 2·8 독립선언에는 왜 「영원한 혈전」의 결의가 표명되었고 3·1독립선언서에는 왜「최후일인 최후일각까지」가 강조되었으며 나아가 우리 헌법전문에서 명시한 대한민국의 모체는 과연 무엇인지 좀 더 올바른 자세에서 구명해 보기 바란다. <사학가·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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