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공 문화혁명의 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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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모택동 북평 탈출이란 충격적이며 「드라머틱」한 정보에는 검토해 보아야할 요소가 너무도 많은데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을 종합 추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문제의 핵심은 65년 10월의 당 중앙의 확대회의에 관한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모택동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65년 9, 10월의 당 중앙의 회의 때 당 중앙에 수정주의가 생겨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고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평 탈출을 꾀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 회의란 65년 9, 10월의 당 중앙의 확대회의를 가리키는 것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 회의에 관해서는 이미 66년 6월 6일 「해방군보」도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적기를 높이 들고 대혁명을 끝까지 추진하자―문화 대혁명에 관한 선전 교육의 욧점』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모택동은 65년 9월에 당 중앙의 회의에서 국내 반동 사상 비판의 긴급성을 호소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9, 10월의 당 중앙 회의야말로 극히 중요한 회의였으며 여기서 모택동에게 북평 탈출을 결의시킬만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때의 의견 대립은 대 약진정책에서 결과된 61년과 62년의 경제 조정기에 이르는 일련의 국내 건설과정의 평가 문제였다.
최근 유소기·등소평 등이 이 경제 조정기에 실권을 쥐고 조정 정책을 실시한 것이 비판받고 있는 사실과 모·임파의 뜻을 받든 홍위대가 이 운동의 초기에 인민공사의 원형 복귀를 「슬로건」으로 내어 세운 것으로 보아 조정 정책에의 비판이 모택동 등 주류파의 안목이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지난 1월 17일 북평 시내에 나붙은 북평 대학 홍위대의 벽보에 의하면 모택동은 이 회의에서 유소기에 대해 『당신은 어느 사람을 비난하여, 너 같은 바보는 없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당신도 과히 영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자기 아내인 왕광미를 지독하게 추켜세웠으니』라고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다음 모택동이 중풍 발작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확인할 자료는 사실상 없다. 그러나 모택동이 이때를 마지막으로 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다는 사실과 중공의 「텔리비젼」이나 홍위병 집회에서 본 모택동의 모습으로 판단하면 확실히 그는 한번 가벼운 중풍의 발작에 걸린 것처럼 완만한 동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작년 3월 모택동과 회견한 일공 궁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중한 미원창은 귀국보고 강연에서 『「레닌」은 일찍이 「좌익 소아병」이란 명저를 썼으나 현재 써야할 책은 「좌익 노인병」인 것 같다. 동맥경화가 되었는지(지명은 피했으나 모택동을 가리킨 것임을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되지 못한 교조적인 것을 지껄이며 자설을 남의 인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공에서 제명 처분된 서택강이가 『중공에서 돌아온 궁본은 당 중앙위에서 「모택동은 이제 노쇠하여 머리가 희미해졌다」고 보고했다』고 말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모택동이 그런 발작을 일으켰으리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모택동은 자기 건강도 생각하고 사태가 긴박함을 깨닫고 황망히 엄동의 북평을 뗘나 유명한 보양지인 항주행을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유소기 등도 사태의 중대성을 깨달아 급거 북평의 체제를 굳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최후까지 모택동과 거취를 같이 한 것은 강청 부인과 진백달이었던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더우이 강청이 유소기의 아내인 왕광미에게 모택동의 북평 탈출 의향을 전했는데도 이것이 무시되고 결국 주은래가 사이에 끼여 탈출을 도왔다면 최근의 왕광미에 대한 강청의 감정적 비난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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