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촛불을 흔드는 건 바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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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석천
논설위원

그제 퇴근길 서울 서소문의 한 식당. 고기 굽는 불판 앞에서 넥타이 맨 회사원들이 소주잔을 주고받고 있다. 회색 넥타이의 시선이 TV 화면에 머문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저게.” 노란 넥타이도 TV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가지가지들 하신다. 진짜.” TV에선 앵커 멘트가 흘러나온다. “한만수 후보자가 오늘 사퇴했습니다. 중도 사퇴한 장·차관급 후보가 여섯 명….”

 긴장감으로 팽팽해야 할 정권 초반이 잇따른 인사 파문 속에 실망과 허탈감으로 얼룩지고 있다. 시중에는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국격 떨어진다’고 개탄하고 있을 것”이란 농담까지 오간다. 편법 재산 증식, 병역 면제, 주식 신고 누락, 성 접대 의혹, 해외 비자금…. 사퇴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미래창조과학부(김종훈), 국방부(김병관), 법무부(김학의), 공정거래위원회(한만수), 중소기업청(황철주). 박근혜 정부의 역점 사업을 추진해야 할 주무부처에서 줄줄이 사단이 났다. 새로운 미래를 열고 안보와 법질서를 지키며 경제 민주화를 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구상이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퇴장하는 뒷모습도 엇비슷하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던 이들이 모두 자진 사퇴 수순을 밟았다. 누구는 가정으로, 누구는 기업으로, 누구는 대학으로 돌아갔다. “진실을 밝혀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한 이도 있다. 이런 식의 인사가 몇 번 더 이어지면 남아날 인물이 없을 성싶다. 한 공무원은 “이젠 통·반장 하기도 무섭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공직에 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봐 몸을 사리게 된다”고 하소연한다.

 당장 직격탄을 맞은 곳이 청와대 민정 라인이다. 왜 이 지경이 되도록 검증을 제대로 못했느냐는 비판이 들끓고 있다. 야당에 이어 여당도 책임자 문책을 요구했다. 경찰로부터 김학의 전 차관 내사를 사전에 보고받았는지를 놓고 혼선이 빚어지면서 민정수석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그런데 논의가 한쪽으로 쏠릴 땐 올바른 방향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반쪽의 진실만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간의 상황이 오로지 민정 기능의 탓일까. 사정기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과거엔 국정원이 인사 검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숨소리까지 뒤져서 후보자의 흠결을 보고했다. 지금은 국정원에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 민정수석실 검증팀 9명이 80여 명의 후보자를 일일이 검증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부실 검증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라고 판단될 땐 목을 걸고 직언하는 게 참모 된 자의 자세다. 그러나 인사는 추천과 검증, 두 단계로 이뤄진다. 앞 단계인 추천 과정에 잘못이 없었는지 묻지 않고 검증 쪽만 문제 삼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한 정치권 인사의 말이다.

 “요즘 정치인들 모인 자리에 가면 몇몇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들이 대통령 옆에서 인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얘기다. 그렇게 정답 다 내놓고 민정이 보라는 것인데 추천 과정을 거론하자니 대통령과 맞서는 것 같고, 확실한 증거도 없고, 부담스러우니까 민정 라인을….”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일방통행 인사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 내부의 메커니즘에 있다. 증거가 있느냐고? 정황은 있다. 낙마자들이 유독 역점 부처에 집중된 것이 그 첫 번째 정황이요, 크고 작은 의혹에도 인사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정황이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촛불의 흔들림을 보고 우리는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안다.

 숨은 퍼즐은 언젠가 드러나겠지만 그땐 늦다. 대통령 임기 5년 중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이다. 국민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지금, 인사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 대통령도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기대한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