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바수술 이야기]①새로운 수술법을 꿈꾸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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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명근 건국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물론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 완벽한 치료는 아닐세. 그렇지만 움직이는 판막의 구조 변화를 계산해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더군. 먼 훗날에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스타 교수는 정교한 손놀림으로 수술을 마무리하면서 눈을 찡긋했다.

"닥터 송이 한 번 해보겠나?"

내가 스타 교수를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명성이나 화려한 경력, 뛰어난 수술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날 그의 단순하고도 명쾌한 대답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개발한 치료법의 한계를 망설임 없이 인정하면서, 후학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줬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내가 가장 본받고 싶은 스승의 모습이다.

내가 흉부외과 전문의가 되어 미국으로 갔던 시기는 1980년대였다. 자국의 의사가 부족해 외국의 의사들에게 쉽게 면허를 줬던 1960~70년대와 달리, 미국 내에서도 이미 의사 수가 포화돼 외국인에게 의사면허를 주는 과정이 대단히 까다로워진 시기였다.

당시 미국 의사 자격으로 비자를 받으려면 VQE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국내에서 500여 명의 응시생 중 2~3명이 겨우 합격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다. 수술을 배워야 했던 나로서는 반드시 미국 의사 자격을 얻어야만 했다.

밤새도록 공부하던 내게 방해가 될까 돌쟁이 아이를 내내 업고 달래던 아내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불평 없이 나를 지지해준 고마운 부인 덕택인지, 나의 절박함 때문인지, 나는 시험에 무사히 통과해 1984년 7월 미국 오리건 대학 병원에 심장외과 전임의로 취직하게 됐다.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탄 나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서울의대를 졸업했고,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던 VQE를 통과했고, 미국에서 당당히 취직해서 높은 보수를 받고 일을 하게 됐다. 이 때문에 나는 금방이라도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꿨던 노벨 의학상에 한 발 다가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게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근 첫날 중환자실에서 나는 약물자동주입기를 처음 봤다.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기계가 도입되지 않아 간호사가 일일이 조절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일상적이지만 내게는 낯선 기계들은 그 외에도 너무나 많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사용이 서투른 왼손의 역할은 조수가 하는 게 당연했던 한국과 달리, 왼쪽 손도 똑같이 훈련해 양쪽 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미국 외과의들의 모습 역시 내게 생소한 광경이었다. 나는 대학에 발을 들여 놓은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세계 최고는커녕, 내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해 보였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당했다. 어떤 환자는 한국 참전으로 인한 부정적인 기억 때문에 내 진료를 거부했다. 일부 동료 의사들은 주말에도 출근하는 나를 비웃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내게는 약이 됐던 것이, 그래서 나는 그들을 능가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원리를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최신 지식은 차이가 날지 몰라도 기초 과목은 그들이 배운 것이나 내가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기에, 수학이나 물리를 깊이 공부한 내가 기초부터 탄탄히 쌓아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앞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한참 빠져 있던 무렵이었다. 스타 교수가 내 인생을 바꾼 질문을 던졌던 것은.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반드시 판막의 움직임을 규명해 새로운 판막수술법을 개발해내리라고. 그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해내서, 그들을 반드시 능가할 것이라고. 그때는 몰랐다. 그 질문이 내 평생에 걸친 성취의 동기가 되고, 또 가장 큰 시련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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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교 기자 simkyo@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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