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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프리즘] 노무현식 정계개편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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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차관급 치안보좌관은 곤란합니다. 현재 청장이 차관급인데 청와대에 차관 자리를 두면 조직.지휘체계가 이원화돼 경찰은 망합니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주재로 열린 인수위 핵심관계자 회의. 盧당선자가 재난 관리 등을 담당할 치안보좌관 신설을 제안하자 문희상 비서실장이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당선자는 이내 "그런 면이 있겠군요"라며 철회했다.

이날 회의에는 민정수석으로 결정된 문재인 변호사도 참석했다. 그는 튀는 디자인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당선자가 "이제 코디가 따라 붙었네"라며 조크를 건넸다. 변호사를 함께 한 후배가 처음 나온 회의에 낯설어 하자 어색함을 덜어주려는 배려였다.

당선자의 실용적 일처리와 탈(脫)권위주의 스타일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경제장관으로 거명되는 G씨는 그의 겸손함에 반해 합류할 마음이 생겼다며 일각의 '盧비어천가' 비아냥을 비판한다.

*** 野에 미소…공세 일단 차단

그런 당선자가 국회, 특히 야당과의 대화.협력을 강조하며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야당 입장에서는 경계할 양동.지연 작전일 수 있다.

그가 그리려는 정국 지도가 여소야대 타파에 있음을 감안하면. '총선 후 다수당에 총리 배분' 제안이 한나라당에 좋은 일 시키려는 게 아님은 뻔하다.

하기야 한나라당이 당선자의 속내를 모를 리 없을 터다. 당선자가 명분을 선점한 데다, 선거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해 어정쩡하게 끌려가는 것일 게다.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다는 등의 위안으로 한나라당을 적절히 '묶어 둔' 당선자의 여권 내부를 향한 손길은 바쁘다.

노사모에겐 '앞으로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며 해체 보류를, 민주당에는 총선 승리와 이를 위한 의원들의 기득권 포기를 주문 중이다.

당선 직후 민주당 내 개혁파의 인적청산.지도체제 개편 촉구를 제지하며 당부한 '절차와 속도조절'이 구체화하는 듯하다.

*** 기회 잘 잡는 문희상 역할 주목

"(민주)당은 저절로 정리되게 돼 있다. '옆'에서 나설 필요가 없다. 상향식 공천제만 확립되면 누가 딴짓한 사람들을 선출하겠나. 설령 공천을 받더라도 당선되겠는가. 지도부 구성도 물론이다." 여권 신주류 핵심 인사의 장담이다. 정리대상이 누구이고, 누가.어떻게 공천과 당선을 저지할 것인지 대략 예상된다.

당선자의 정치참모는 文실장이다. 그는 80년대 중반 '부산상고 3인방' 일원이던 유순철(작고) 소개로 당선자를 만났고, 선거기획단장으로 오늘을 일궈내는데 기여했다.

그는 또 DJ의 첫 정무수석으로 구 민주계(PK)와의 전격적인 대연합을 정국돌파 방안으로 제시했다가 TK세력 개별 영입(일명 낚시질)을 주장한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밀려난 적도 있다.

유(柔)하지만 기회가 포착되면 밀어붙이는 모사인 것이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결정적 순간 승부수를 던지는 당선자(文실장 표현)"가 때론 강공을 마다않는 참모와 함께 구상하는 정국 밑그림은 짐작이 간다.

고사(枯死) 우려까지 나오는 한나라당 일각의 위기감도 그래서 이해된다. 호텔 안가를 거부하고 아침 5시 반 경기도 의정부 자택을 나서는 文실장-.

그랜저XG 승용차를 고집하는 그의 절제도 盧정부의 사정.정치개혁 작업이 간단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정계개편은 이미 시작됐다.

김현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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