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는 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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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아무래도 병오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 영등포「갱」의 하회는 여전한 미궁이요. 대구에선 큰 불이 나고, 기차고 자동차고, 세상의 차란 차는 저마다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막상 정미년은 아직 이 땅에 당도하지 않았다. 동짓달 보름을 넘기면 한해가 다간 것으로 친다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면 병오년은 거의 소진한 셈이다. 그러나 음력이 아무리 음력이로소니, 구정을 한달 너머 먼 훗날에 바라보는 오늘, 양의 해가 이미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야 있는가. 지난 한해의 마세가 하도 요란스러웠기에 용설과 춘풍을 몰고 어진 양의 떼가 우리를 찾아 줄 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다. 「양은 선하고 의롭고 미한 짐승」이라고 읊은 「목양송」이란 한편의 시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양이 진정 그러한 영물이고 양의 해가 「선하고 의롭고 미」한 해가 될 판이라면 음력으로 쳐서가 아니라 사실과 현실로 미루어 정미년은 미도요, 병오의 거센 발굽이 미진인 것이다.
음양 두 가지 역법을 한데 비벼셔, 신정을 정미의 첫날로 잡고, 양의 미덕을 들먹이면서 좋아라하는 것은 민심의 초조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윈래가 양과 같이 어진 백성이나, 기껏해서 「캘린더」제작자들 뿐이고, 가령 신·구 두 가지 역법의 공존에서 어부지리를 보는 장사아치들의 속셈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금은장수, 물장수, 푸줏간, 목욕탕, 이발소 등이 신정 초의 공백기를 틈타서 요금을 슬쩍 올려 받기 시작했다고 해서 정미년 초장에 먹칠을 했다고 나무라서는 안된다. 그들에겐 신년초는 병오년의 막바지요, 정미 신년을 맞을 대목에 불과한 것이다. 병오가 완전히 가시기전에 전가의 보도인 마각을 슬그머니 드러낸 것이다. 「목양송」 첫머리에 「시인은 양을 기른다」고 했다. 「살기에 지쳐 고달픈 몸과 잃어버린 생활을 찾기 위하여」생의 고달픔을 덜기 위해 병오니, 정미니 하는 유물을 청산하는 것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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