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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정조 어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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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나는 조금 나아졌고 앞으로 더욱 나아질 것이다.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 간다.”(1799년 1월 20일)

 정조(1752∼1800)는 사망 전 해 우의정 심환지(1730~1802)에게 편지로 이렇게 털어놓았다. 백성을 걱정하는 성군의 마음이 애틋하다.

 이번 회는 글씨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글씨의 주인은 정조다. 4년 전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진 정조어찰첩 얘기다. 어찰첩이 경매에 부쳐진다. 추정가는 12억∼20억원,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에서다. 27일 경매 전까지 전시장에서 누구나 임금의 밀서를 볼 수 있다.

정조어찰첩(1796∼1800)의 한 페이지. 피봉(왼쪽)의 가장 큰 글씨는 삼청동에 살던 심환지를 이르는 ‘삼청동부(三淸洞府)’ ‘삼청동문(三淸洞門)’ 등의 수신처, 그 옆엔 심환지가 부전지를 덧대 편지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뒀다. [사진 K옥션]

 정조어찰첩은 어찰(御札·임금의 편지) 297통과 피봉을 6권으로 장첩한 형태다. 1796년 8월부터 붕어하기 직전인 1800년 6월까지 4년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묶음이다. 정조는 정치적 적대 관계로 알려져 있던 노론 벽파의 선봉 심환지와 실은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논의했으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음이 편지를 통해 새로이 밝혀졌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야당 당수와 긴밀한 정치적 동반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덕치에 기반한 왕도 정치, 계파를 아우르는 탕평 정치엔 이 같은 물밑 파워 게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조는 당시 정치 활동의 총감독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내일 신하들을 소견할 것인데, 반열에서 나와서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1799년 3월 6일의 편지에서 정조는 이렇게 지시하며, 이에 따라 파직시키고 후에 다시 임명하겠다고 약속한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다음 날 심환지는 정조의 연출대로 완벽하게 행했다. 편지엔 거친 표현과 분노도 감추지 않았다. “호로자식” “입에서 젖내 나고 사람 모습도 갖추지 못한 놈” 등이다.

 ‘찢어버려라’ ‘세초(洗草: 조선시대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여기 사용된 초고들을 파기하는 것)하라’ 누누이 당부했건만 심환지는 어명을 거역했다. 일종의 정치적 보험으로 남겨뒀을 것이다. 덕분에 200년 뒤의 우리는 정조가 아닌 인간 이산의 모습을 다채롭게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왕의 편지는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모양이다. 이제는 값이 매겨져 시장에 나왔다. 생전에 정조는 심환지가 이를 파기하지 않을 거라 짐작한 듯하다. 그러니 없애라 신신당부했겠지. 그러나 판매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 같다. 편지가 이번엔 제값을 치르고 오래 간직할 주인을 만나면 좋겠다.

권 근 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