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문화계의 ‘어른’을 키우는 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프랑스 칸 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은 80대 노신사 질 자콥이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한 건 몇 해 전 칸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할리우드나 프랑스의 영화전문지들은 매일 영화제 소식지를 펴낸다. 그해의 소식지에는 질 자콥의 칸 영화제 재직 30년을 축하하는 광고가 줄줄이 실렸다. 영화평론가였던 그는 1970년대 말 칸 영화제에 합류했다. 수많은 영화 중에 초청작을 선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30여 년 동안 새로운 부문을 신설하고, 영화제 전용극장을 만들고, 전 세계 미디어가 주목하는 잔치로 영화제를 키웠다. 칸 영화제가 60회 기념으로 2007년 만든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도 그의 솜씨다. 전 세계 이름난 예술영화 감독들이 총출동해 극장을 주제로 각자 만든 단편 모음인데, 이를 제작한 이가 질 자콥이다. 오랜 구애 끝에 할리우드 거장 스필버그를 5월 열릴 올해의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한 것도 그다. 그의 직함은 몇 차례 바뀌었는데 그중 ‘위원장’으로 불린 지도 벌써 10여 년째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례지만,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도 2010년까지 15년간 영화제를 이끌었다. 그는 한국에서도 영화제란 걸 열어보자는 몇몇 영화청년들과 1996년 출범 때부터 의기투합했다. 옛 문공부 관료 출신으로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그가 환갑을 바라보던 무렵이다. 그의 존재는 신생 영화제가 빠르게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외 영화인들과 격의 없는 술자리, 함께 찍은 사진을 다음에 세계 어느 영화제에서 만나든 건네주는 배려 등등 남다른 친화력은 해외에 부산의 입소문을 빠르게 전파했다. 영화제 살림살이는 빠듯하다. 김동호 전 위원장의 모습 역시 흔히 생각하는 ‘위원장급’은 아니었다. 수행원이나 비서가 없이 손글씨로 직접 일정을 적은 수첩을 비서로 삼았다.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숱한 해외출장은 통상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다.

 이런 그에 대한 영화계의 애정은 최근 개봉한 단편영화 ‘주리’에도 드러난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 이 영화는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격론을 벌이는 내용이다. 임권택, 안성기, 강수연부터 신예 독립영화인까지 크고 작은 역할로 등장하고, 이름난 감독들이 각본·각색·편집에 기꺼이 참여했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문화도 오늘 씨 뿌렸다고 내일 열매를 거두기는 힘들다. 뛰어난 창작자만 아니라 창작과 향유의 여건을 키워내는 문화행정가가 필요하다. 특히 미미했던 시절부터 헌신한 행정가라면 창작자들의 역량을 이리저리 모으고 이견을 중재하며 산업의 큰 그림을 그리는 어른 노릇도 할 수 있다. 몇 차례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문화 관련 기관장 자리는 나가라, 못 나간다 진통을 겪었다. 싹쓸이식 물갈이만 거듭해서 문화판에 남는 건 흉한 상처일 터다.

이 후 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