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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어르신에 무료장수 사진 촬영 … “사진 처음 배울 때 꿈 꿨던 일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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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낭만스튜디오 김천기씨는 시골 마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무료 장수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죽음’은 금기어지만 미리 수의와 장수(영정)사진을 준비해 두면 오히려 오래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연로하신 부모님이 쓰러져 병석에 누우면 그제야 부랴부랴 주민등록증을 들고 사진관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정말 안타까웠어요.”

시골마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무료 장수사진을 찍어 주는 사진사가 있다.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신낭만스튜디오’의 김천기(46)씨다. 아날로그 시절부터 대형스튜디오에서 사진 수정 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던 김씨는 천안 신부동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었다. 시내의 사진관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정신 없이 바빴다. 30분 단위로 사람만 바꿔가며 똑같은 촬영을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사진만 찍다 보면 영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회의를 느끼던 김씨는 지난 2007년에 도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광덕면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10년 후엔 제가 꿈꾸던 작가가 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무엇보다 사진은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모두 여유가 있어야 원하는 대로 사진이 나옵니다. 다행이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생각이 열려있고 여유 있게 사진 찍기를 원하죠. 장수사진 봉사는 사진을 처음 배울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에요.”

지금의 스튜디오는 3년 전 농기계 수리센터 창고를 얻어 폐자재를 주워다가 1년에 걸쳐 혼자 리모델링 공사를 해 완성한 곳이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김씨를 보며 마을 주민들의 첫마디는 하나같이 “시골에 사진관을 차려서 어떻게 먹고 사냐”였다고 한다. 걱정과 응원을 아끼지 않으며 사진관 앞마당을 꾸밀 때는 꽃을 가져와 손수 심어 주기도 했다. 마음먹은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김씨는 주민들에게 장수사진으로 고마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광덕면에는 75세 노인들만 800명이 넘는다. 시골 노인들이 장수사진을 미리 찍어 두기란 쉽지 않다. 김씨는 지난 1월에 매당 4리 노인 21명을 스튜디오로 초청에 장수사진 촬영 행사를 가졌다. 앞으로 본인에게 다가올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일이라 처음엔 무척 조심스러웠다. 노인 중에는 드러내 놓고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남길 사진이라 생각하고 기왕이면 정정할 때 찍자고 권하니 모두들 수긍해줬다. 한 명씩 혼자 와서 찍으려면 쑥스러워 힘들지만 여러 명이 단체로 참여하니 어색함 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멋진 베레모를 쓰고 온 노인이 있는가 하면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오는 노인들도 있었다. 노인들은 자연스러운 사진을 위해 농담을 나누고 서로 웃겨 주는 등 화사한 웃음과 편안한 자세로 촬영에 참여했다.

김씨는 “사진을 찍고, 수정, 인화에 코팅작업을 해서 늦어도 3주면 받아 볼 수 있게 했다. 이왕이면 좋은 액자에 끼워주고 싶은데 넉넉지 못해 좀 더 고급스럽게 못해주는 것이 오히려 죄송하다”고 말했다.

장수 사진이 액자로 완성돼 전달되던 날에는 마을회관에서 조촐한 잔치가 열렸다.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마련해 온 노인들은 사진 액자를 보며 서로 “누가 예쁘네, 누가 잘 나왔네” 하며 즐거워했다. 모두 환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장수사진 느낌이 안 난다며 반겨 주었다. 안면마비가 와서 사진 찍기를 꺼려하던 노인도 본래 얼굴과 가깝게 복원해 수정해 주니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김씨는 광덕면사무소와 연계해 한 달에 한 번씩 광덕면의 75세 이상 노인들의 사진을 꾸준히 촬영할 예정이다.

김씨는 “주로 농사일을 하는 노인들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촬영을 한다. 농번기에 힘들다면 농한기를 이용해서라도 꼭 참여하길 바란다”며 “사진에 담겨지는 편안한 웃음 그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생활을 보내길 마음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글·사진=홍정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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