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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19) ‘고난대행’인 권한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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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4년 3월 16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국무위원들이 회의가 열리기 전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준비를 하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조영길 국방부·반기문 외교통상부·정세현 통일부 장관. [중앙포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사태가 일어나고 2주 정도가 지난 어느 주말 오후. 전화가 울렸다. 손자(당시 8세)였다. ‘아,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피로와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전화로 낭랑한 손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왜 전화 안 하셨어요? 두 번이나 빼먹으셨는데. 그래서 제가 전화 드렸어요.”

 “어, 그래. 할아버지가 잊고 전화를 못 했네. 미안, 미안.”

 바쁜 총리 생활이었지만 틈틈이 손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손자에게 전화를 해서 새로 배운 사자성어를 물어봤다. 그리고 내가 더 설명을 해주곤 했다. 총리라는 직분을 잠시 내려놓고 손자 목소리도 듣고 정도 나눌 수 있는, 나에게는 나름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번 주말마다 한 번씩 빼먹지 않았는데, 이번엔 2주일이나 건너뛰었다.

 “바빠서 할아버지가 깜박 했구나. 그래, 이번 주는 어떤 사자성어를 배웠지?”

 손자가 자신있게 소리쳤다.

 “고난대행.”

 “….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곳이 쓰렸다. 여기저기 언론에서 ‘권한대행이 고난대행’이란 기사가 실렸다. 8살 어린 손자도 그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나 보다. 고난(苦難)대행. 그랬다. 매일이 고난이었다.

 “할아버지 많이 힘드시죠. 맨날 할아버지가 TV에 나와요. 그런데 고난대행하면서 월급은 얼마나 더 올랐어요?”

 수당 한 푼 더 얹어주지 않는 ‘고난대행’ 생활이었다. 웃으며 답했다. “하나도 안 올랐다. 그러니까 네 용돈도 못 올려준다. 하하.”

 이렇게 잠깐이라도 웃을 거리가 있다면 운 좋은 날이었다. 책임감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안보가 걸렸다. 갑작스레 권한대행이 되고 나서 가장 걱정한 것은 우발적으로 남북 간 긴장 상황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북한은 연평해전을 일으켰다. 대통령 탄핵 소추 정국을 틈타 국지적인 군사 충돌을 감행할 위험이 있었다. 북한에 도발의 구실을 줘서도 안 됐다.

 2004년 3월 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국무위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겸한 서해접경해역 조업질서 확립대책 회의를 열었다. 궁리 끝에 나온 방안이었다. 봄 꽃게잡이 철을 맞아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회의를 개최했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북한의 무력 도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북방한계선(NLL) 경계를 강화하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회의 시작 부분만 언론에 공개하고 핵심 보고 사항은 비공개에 부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장승우 해양수산부 장관, 조영길 국방부 장관, 이승재 해양경찰청장이 참여했다. 안상수 인천시장과 조건호 옹진군수까지 배석하도록 했다. 사흘 전인 3월 1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관계부처 대책회의 결과를 종합해서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먼저 보고했다.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방중 기간 각종 외교채널을 활용해서 실효적 단속 조치를 강구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장승우 해수부 장관이 현안과 조치사항을 설명했다. 이어 조영길 국방장관의 차례였다.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상황을 고려해 대응 전력을 증강 배치하겠습니다. 또 중국 어선의 NLL 진입을 차단하고,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즉각 나포 및 퇴거 조치를 하겠습니다.”

 조 장관의 핵심 보고 사항은 그 다음 내용이었다.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을 불허하고 대응 지침에 의거해 NLL을 수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어선 단속 과정에서 남북의 우발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습니다.”

 이승재 청장의 보고까지 끝나자 준비했던 당부 사항을 말했다.

 “NLL에서의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이 없도록 대책을 마련하세요. 그와 동시에 만반의 대비 태세를 확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걱정했던 남북 긴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촉발됐다. 2004년 4월 22일 북한 평안북도에서 발생한 경의선 용천역 폭발사고였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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