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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것이냐? 『고려』 첨가냐?|석가탑 「사리」장치에 이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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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주=이종석·최기화 기자】세계서 가장 오래된 목판경을 포함하는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치 일괄 장엄구를 두고 그 시대구분에 대한 학계의 견해가 둘로 나누어져 새로운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유물조사를 위해 국립박물관에서 불국사 현지로 파견한 윤무병 학예관은 l일 석가탑서 나온 유물을 조사하고 동경(동경=백동으로 만든 거울 2개)과 머리 장신구(동제 「핀」 3개)가 고려의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따라서 석가탑이 고려 어느 시기에 개탑(개탑)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세워 그 사리 장엄구가 모두 1천2백여년 전 신라 때 유물이고 조탑(조탑) 후 처음으로 탑을 열었다는 종래의 견해를 뒤엎었다.
이제까지 석가탑 유물은 신라 경덕왕 10년(서기 751년) 탑 창건당시의 물건들로서 원상 그대로였을 것이라는데 학계의 의견이 일치했으며 따라서 석가탑이 지난 10월13일 해체되면서 3백여점의 찬란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을 때는 온 국민을 흥분케 한바 있었다.
이의 학술조사를 위촉받은 국립박물관 조사단은 지난달 27일 이후 낱낱의 물건을 재검토, 동경(동경)에 무늬가 없고 살과 테가 두터운 점으로 미루어 고려 동경양식과 흡사하다는데 주목하게 되었다. 김정기 고고과장, 한병삼 학예사 등 3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이밖에도 창건 이후 개탑할 때 첨가한 흔적을 몇 가지 잡았다고 밝혔다.
첫째, 중앙 사리 병 위에 얹은 세 개의 유향 봉지 가운데 쓰인 「중대사」란 승직은 신라 때 기록엔 없고 고려사에서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종이나 비단엔 묵서로 승려의 이름이 여럿 적혔는데 이것은 불국사가 황폐한 뒤 안목이 모자라는 시골 중의 소행인 것 같다.
다른 신라 사리장치엔 이런 예가 없으며 또한 「김대성」 등 창건당시의 인물의 이름을 전혀 볼 수 없는 것도 이상하다.
셋째, 은제 내합은 원래뚜껑이 있었던 것 같다.
박물관 윤부관장은 이런 여러 점으로 보아 석가탑은 창건 3, 4백년 뒤인 고려조에 개수됐고 그때 장엄구를 더 넣어 원래의 사리함 밖에 여러 유물들을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리함 바깥의 사리공 장엄구는 동경·머리장신구·비천상·대형 수정구슬·소형 목탑·수필본(수필본) 사경·비단 등이다.
그러나 그는 금동 외함 내부의 갖가지 장엄구는 창건당시의 유물로 보았다. 즉 3개의 사리용기와 목판무구정토 대 다라니경 및 모자곡옥 등은 신라 때 유물로 보이나 좀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는 일반에 알려진바 없었던 사리공 바닥에 깔려있던 종이의 글씨를 판독할 수 없음을 안타까와 했다.
습기로 말미암아 한 덩어리의 떡처럼 굳은 이 종이뭉치(두께 약 5밀리)에선 「설이이합」 등 몇 글자를 가까스로 읽을 수 있을 뿐 내용을 판독할 수가 없어 불경일 것임을 짐작했을 뿐이다. 워낙 보존 상태가 나빠 그 판독과 보존은 외국의 기술에 의존할 밖에 없는데 그 속엔 연호·간지가 기록됐으리라 보고 판독된 다음의 학문적인 가치가 크게 기대되고 있다.
▲황회영(동대 박물관장) 교수의 말=동경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나 금동 외함 내의 물건과 비천상 등 틀림 없는 신라 때의 물건이다. 「중대사」는 처음부터 이상스럽게 생각되어 추후 연구과제라 직감했다.
▲김원용(서울대 박물관장) 박사의 말=처음부터 의심할 점이 충분히 있었다. 동경은 당나라의 그것과 동질의 것이나 확신을 내릴 수 없으며 비단 역시 그러하다. 판독치 못한 사경과 기타 종이의 「카본·테스트」에 의한 과학적인 조사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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