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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무당 예술가 오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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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전 그래요. 예술가라는 말은 듣기는 싫어하지만, 좋아요. 여하튼 저는 예술가라면 무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들 얼마나 근사한 무당들인가가 문제이고, 얼마나 우릴 울려주고 감동시키느냐가 문제지요. 무당만큼 울려주고 감동시켜보라 이겁니다.”

 오윤(1946∼86)은 그랬다. 예술가는 무당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신 무당처럼 한세상 뜨겁게 살다 갔다.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할 것인가를 숙제로 삼았던 그다. 목판과 칼을 무기로 시대를 겨누고 새 세상을 꿈꿨다. 그의 판화 속 사람들은 맺힌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며 덩실덩실 춤춘다. 날 선 풍자와 비장하고도 해학적인 표현, 우리 전통의 한과 흥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독보적 경지를 이뤘다. 86년 첫 개인전이 반향을 얻자 부산 공간화랑에서 전시를 열던 중 간경화로 요절했다. 그렇게 혜성처럼 나타나 민중 미술의 상징적 작가로 활약하다가 바람처럼 떠났다.

오윤, 형님, 목판, 24.2×34.3㎝, 1985

오윤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갯마을’의 소설가 오영수, 외조부는 동래학춤 명무 김기조였다. 동래학춤 예능보유자였던 외삼촌의 춤을 가까이서 봤던 오윤은 학춤 무보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서울대 조소과 시절엔 휴학하고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불화를 모사했다. 마흔 살에 사망 후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27년이 걸렸다. 지난해 말 개관한 부산 서구 미부아트센터에서 오윤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오윤이 그린 무보를 비롯해 춤과 관련된 판화 170여 점을 한데 모았다. 유족들이 간직하던 것들이다. 입장료는 무료, 전시는 다음 달 14일까지 진행된다. 오윤의 생일 다음 날이다. 살아있었다면 67세 생일을 맞았을 그다.

 부산 출신 오윤을 고향으로 불러들인 것은 미술 문외한의 사업가. 선박부품 제조 업체인 한국미부주식회사 대표이사이기도 한 지영만 관장이다. 1일 전시실서 만난 그는 “못 배운 부모가 자식들 공부시키는 기분”이라며 미술관을 연 취지를 에둘러 말했다. “오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미술을 했나 보다”라고도 했다. 그러니 오윤은 80년대 동료들의 회고에만 머무르는 민중미술 아이콘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이며 미래다.

 먼저 간 무당 예술가는 말한다. 세상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팍팍한 세상, 시름도 분노도 춤에 날려 버리라고. 그의 판화 속에선 호랑이도 추고, 할머니도 추고, 도깨비도 춤춘다. 목판 ‘형님’(1985)에선 양푼·주발 앞에 놓고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어우렁더우렁 춤추며, 이렇게 뇌까린다. “시름 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우라질 것 놉시다요 도동동당동.”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