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스펙이 부족하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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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언제부턴가 ‘스펙’이란 말이 일상용어로 쓰인다. 영어 specification을 줄인 말이라 하니 우리말로는 설계명세서·내역서쯤 되겠다. 일본식 한자어 ‘사양(仕樣)’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이왕이면 품목·설명서 같은 말로 바꾸길 권한다. 어쨌든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 사이에서 스펙은 이성관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사이자 고민거리다.

 예를 들어 내가 승용차라면 이런 식이다. ‘오디오와 내비게이션 장착, 후방 카메라·경보기까지 달았고 가죽 시트에 열선도 들어 있습니다. 조수석 에어백도 있고요. 다만 삼수해서 대학 들어가 군대·해외연수 다녀오고 취업준비로 2년 더 묵었더니 연식이 좀 됩니다. 결정적인 흠은 배기량이 800cc밖에 안 되는 데다 번호판마저 지방 것이라서…’. 학점과 어학성적을 필두로 스펙 3종 세트, 5종 세트 같은 말들이 난무하니 불안이 불안을 낳고, 이 와중에 살판난 것은 스펙을 달아준다는 학원·컨설팅업체들이다.

 정작 학생들이 원하는 일류기업들은 생각이 다르다. 획일적인 스펙 경쟁에 신물이 나 있다. 한마디로 “스펙보다 사람”이라고 한다. 대학가의 애처로운 도로(徒勞)를 덜어주기 위해 지원가능 스펙을 미리 공지하기도 한다. 삼성전자는 홈페이지에 학점(4.5 만점에 3.0 이상)과 직군별 공인 영어성적 기준을 명시해 놓았다. 이 두 가지만 충족하면 서류전형 통과다. 포스코는 아예 채용 1년 전에 학점(3.0 이상)과 어학 기준을 공개한다.

 그 외에 예를 들어 자격증 스펙? 포스코의 정태형 채용담당팀장은 “학원에서 며칠 강의 듣고 6시그마 자격증을 제출한 지원자도 있었다”며 “미안하지만 쓸데없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업 입장에선 열정과 사람·사물을 대하는 인성을 더 중시한다. 4단계 실무급 면접(분석발표·집단토론·전공면접·인성면접)을 거치면 대개 확연히 가려진다”고 했다. 삼성전자 인사팀의 한준호 부장은 자질과 기본기를 강조한다. “스펙이 화려한 지원자에게 면접위원들은 ‘당신이 전공을 위해 노력한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곤 한다. 대학 4년간은 전공 하나 제대로 파기도 부족한 시간이다. 알고 보면 대개 전공에 소홀한 지원자들이다.” 가끔은 중·고교 시절 버릇대로 감히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선행학습(?)을 해오는 지원자도 있는 모양이다. 한 부장은 “우리는 입사 후 어마어마하게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자질과 기본기를 우선시하는 거다. 잡다한 스펙 따기에 몰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열정, 인성, 자질, 기본기.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지원자 입장에선 아직 개운하지 않다.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사람 뽑고 부리는 데 이골이 난 선수다. 한화그룹의 임원은 “면접을 해보면 외적 조건이 다 비슷해 보여도 탐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면접위원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한다”고 말했다. 오랜 감(感)에만 의지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롯데그룹 인사팀의 김진성 수석은 “베스트 피플(best people)이 아니라 조직문화에 적합한 라이트 피플(right people)을 뽑고자 한다”며 좋은 사람을 감별하기 위해 면접관 교육에 엄청 신경 쓴다”고 했다. 사내 인사고과 상위그룹만 면접관 후보에 올리고, 채용시즌 전 이들을 3일간 교육시킨 뒤 하위성적 20%를 탈락시키고 면접관으로 인증한다는 것이다. 사람 알아보는 프로들 앞에서 분칠한 자기소개서나 불안 달래기용 스펙은 금방 들통 난다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 정부는 대선 공약과 인수위 국정과제를 통해 ‘스펙을 초월한 채용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차차 실천에 옮겨질 것이다. 지레 드는 걱정이지만, ‘스펙 초월’이 과거 정부의 대입제도 다변화처럼 경제력 있는 집안 젊은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부작용은 절대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수능성적에 이어 대학생의 스펙 두께도 경제력이 좌우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와 있다. 대입 재수 횟수마저 부익부 빈익빈인 판국이다. ‘스펙 망국론’이 왜 나오는지 배경을 좀 더 깊이 살펴보고 구체적인 정책을 세웠으면 한다. 나는 현대 한국사회의 선발·채용제도를 받쳐온 업적주의(meritocracy)가 무너져가는 와중에 돈을 먹고 자라는 스펙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고 본다. 업적주의는 돈·권력·교육권이 대물림 되던 옛 귀속(歸屬)주의를 물리치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으나 이제 더는 아닌 것 같다. 삼성그룹의 열린채용, 지방대 할당, 고졸 공채처럼 기업 차원의 노력들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는 국가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단순한 취업률 차원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