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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로 맞짱떠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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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 주말 몇 분의 역사학자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다녀왔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50㎞! 후쿠오카에서 오려면 138㎞다. 대마도는 가깝기도 하거니와 우리와의 인연도 깊고 오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왕인 박사가 375년 『천자문』 한 권과 『논어』 열 권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처음 닿은 곳이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다. 이곳에 ‘백제국왕인박사현창비(百濟國王仁博士顯彰碑)’가 서 있다. 이외에도 대마도엔 우리와 관련된 유적이 허다하다.

 # 그래서인지 대마도가 본래 우리 땅이고 반환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도 거세다. 현역 육군대령 김상훈씨도 그중 하나다. 근거는 이렇다.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은 대마, 호남은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의 글귀다. 19세기에 작성된 경상도 지도에서도 대마도는 조선땅이다. 심지어 1945년 발행된 ‘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는 엄연히 우리 땅이다. 우리 지도만이 아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시조 격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 만든 『삼국통람도설』 내의 지도에서도 대마도는 조선의 것이다. 비단 지도만이 아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흘 뒤 가진 첫 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회견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대마도 반환은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인들이 뭐라 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면서 ‘대마도 반환’은 전쟁의 포성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대마도 실지회복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일본 시마네현은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을 독도의 일본식 이름인 ‘다케시마의 날’로 정해 기념행사를 해 왔다. 어제도 어김없이 행사를 했다. 집권 자민당 내각은 시마지리 아이코(島尻安伊子) 해양정책·영토문제 담당 내각부 정무관(차관급)을 정부 대표로 행사에 파견했다.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자민당 간사장 대행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자민당 청년국장 등 현역 의원 18명도 참석했다. 실로 역대 최대 규모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신·구 정권의 권력교체로 부산한 시기에 자행된 일이다.

 # 2005년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자 당시 마산시 의회는 이에 대응해 3월 18일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대마도가 한국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며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조선 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우리 외교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불필요한 논란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며 자제를 부탁했다. 그래서인지 마산시가 창원시로 통폐합되자 창원시 의회는 지난해 12월 11일 기존의 ‘대마도의 날 조례’를 ‘창원시 대마도의 날 조례’로 수정했다. ‘다케시마의 날’이 형식상 시네마현의 행사인 것처럼 대마도의 날도 형식상 창원시의 행사인 것으로 수위조절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형식상으론 현 단위에서 열면서도 내용적으론 정부 관여 행사로 지속한다면 우리 역시 ‘대마도의 날’ 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관여해 맞불을 놓아야 마땅하다.

 # 재집권한 일본 자민당은 영토 문제에 관한 한 강경 기조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와는 모리 전 총리가 방러하는 등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초강경이다. 일본이 1855년 러·일 통상조약 이후 점유했다가 2차 대전 종전 후 도로 빼앗긴 북방 4개 섬을 달라 말라 할 입장이라면 대마도는 진작에 우리에게 토해 놓았어야 옳다. 북핵 못지않은 문제인 독도와 대마도! 새롭게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나갈지 두고 볼 일이다.

정 진 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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