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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쇠줄묶인 김태촌 후계자, 칼 들이대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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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사망한 범서방파 보스 김태촌씨의 핵심직계 나모(48) 씨의 납치, 폭행 사건이 세간에 화제다. 사건은 이달 3일 눈 내리는 일요일 밤에 벌어졌다. 평소 안면이 있던 호남의 폭력 조직 국제PJ파(이하 PJ파)의 조직원이었던 조모(54) 씨가 나씨에게 접근했다. 자금 2억원을 대면 큰 도박판을 주선해 이익금을 배분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나씨는 사건 하루 전 2억원을 조씨에게 보냈고, 3일 논현동 한 지하 카페에 차려졌다는 속칭 ‘도박하우스’에 동행했다. 도박꾼들은 보이지 않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정체불명의 ‘어깨’ 5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우스’는 곧 무시무시한 협박과 폭행의 장으로 돌변했다. 감금된 나씨는 이들의 폭행으로 척추와 갈비뼈에 상해를 입었다.

이 사건이 화제로 떠오른 이유는 분분하다. 혹시 김태촌 사후 호남 주먹들의 주도권 다툼의 과정에서 벌어진 활극 아니었을까. 호남계 폭력조직을 대표하는 서방파가 PJ파의 도전에 직면한 것은 아닐까. 이 납치극을 계기로 서방파와 PJ파가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 것은 아닐까.

거기에 일부 언론은 김태촌 사후 전국구 주먹들의 세력 재편, 내지는 판도변화가 시작됐다는 다소 성급한 추측을 제기하기도 했다. 납치극을 주도한 조모 씨가 PJ파에 속해 있어 촉발된 이 궁금증은, 피해자 나씨의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 때문에 더욱 증폭됐다.

나씨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평소 서방파의 행동대장 격으로 보스 김태촌이 가장 신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범서방파 행동대장급 간부로 활동했고, 1986년 일어난 ‘뉴송도호텔 사건’에도 가담했던 인물이다. 보스 김태촌은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에 보호감호 7년이란 중형을 선고받았다.

나씨는 연예계를 비롯해 사회 각 분야 인맥이 매우 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중반 자신이 운영하는 고급 음식점의 탈세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톱클래스의 연예인 다수가 법원에 연명으로 탄원서를 제출한 적도 있다. 당시 탄원서에는 그를 일컬어 ‘예술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란 표현이 들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골 기질에 단호한 실행력, 빠른 두뇌회전과 판단력을 겸비했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 ‘선배 세대’로부터 ‘보스감’으로 낙점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전국구 보스는 ‘연부역강의 노회함’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라고 한다.

초미의 관심사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나씨가 과연 호남계 최대 조직인 범서방파의 새로운 보스로 이미 ‘등극’했느냐의 여부다. 전국구 보스는 그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로 볼 수도 있지만 수사기관의 따가운 감시를 평생 받아야 하는 한 없이 무거운 ‘멍에의 자리’이기도 하다. 설사 정상에 올랐다 해도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미묘한 이유가 많은 자리다.

둘째는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다. 사익을 노린 개인 차원의 범죄 행위냐, 아니면 서방파에 대한 PJ파의 견제 또는 도전 차원이냐다. 만일 새로 등극한 보스를 타깃으로 한 조직 차원의 공격이었다면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경찰 역시 그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펴고 있다.

주먹세계에 정통한 이들은 한결같이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허구임을 지적했다. 이 사건은 조직과 조직 간의 분쟁이 아닌 조직을 빙자한 범죄꾼의 범죄행위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들은 이처럼 사실이 왜곡된 기사로 인해 조직 간의 평화가 깨지고 예기치 못한 전쟁이 야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들로부터 사건 경위와 과정을 접한 기자는 나씨를 잘 아는 한 지인을 통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의사를 간곡히 전달했다. 결국 이달 13일 저녁 수도권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한 나씨를 어렵게 만났다. 그가 장시간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전날 수술을 받고 가슴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지만 태도는 당당하고 여유가 있었다. 단박에 눈길을 끈 것은 걷어붙인 환자복 소매 아래 굵직한 ‘통뼈 팔목’이었다. 그는 월간중앙 기자와 만나 “주먹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무도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진=중앙포토]

-일부 언론에서 김태촌의 뒤를 잇는 범서방파의 새로운 보스로 지목했는데 맞나.
“형님 돌아가신 후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오보다. 누구에게 확인했는가. 어떤 근거로 그런 기사를 쓰나.”

-새로운 보스라는 확증은 물론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력한 실세, 차기 보스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란 조직 내외의 평가가 있다고 들었다.
“ 형님의 삶의 궤적은 고단했다. 무려 36년이 넘는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지 않았나. 돌아가신 후 내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과 모색을 하고 있던중 이었다.”

-이번 납치, 폭행 사건이 범서방파와 PJ파 간의 갈등의 소산이란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이번 사건은 조직 사건이 아닌 인간말종의 범죄꾼이 저지른 비열한 범죄행위다. PJ파와는 갈등이고 분쟁이고 할 관계도 사이도 아니다. PJ 쪽도 조씨의 범행수법이 주먹세계의 룰에 어긋난,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고향 선후배 사이라 약 1년 전 처음 만나 안면을 텄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찾아와 위로와 호의를 표하기에 친근하게 대해준 것이며 돈도 믿고 준 것이다. ”

-사건 당일 카페 지하에서의 구체적 상황이 궁금하다.
“창피해서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그의 행위가 범죄꾼의 수법이라면 실체적 진실을 밝혀 조직간의 분쟁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은가.
“ (한참을 생각하며 분노를 삭이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지하 하우스에 도착해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출입문을 잠근 후 대기하고 있던 6명이 내 목에 회칼을 들이대며 ‘나를 납치한 것’이라고 했다. 내 지갑과 휴대전화를 빼앗은 후 가슴과 손을 결박했다. 테이프로 눈과 입을 가린 후 사형수에게나 씌우는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다시 두건위 내 목을 무슨 줄로 감았다. 그리고는 허벅지를 칼 끝으로 자극하며 협박을 시작했다. 나도 알고 그도 아는 박모씨라는 인물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 동생들에게 내리라는 것이었다. 다시 두건을 풀어주며 잠시 다녀올 테니 잘 생각하라고 한 뒤 조씨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씨가 동원한 아이들을 보니 훈련이 덜된 애들이라고 판단했다.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쇼파에 놓인 칼을 묶인 채로 잡았다 그들이 칼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고 약 3~4분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칼 목이 부러지며 내가 다시 제압을 당하였고 그 과정에 조씨가 다시 들어왔다. 조씨의 지시로 그때부터 무차별한 린치를 당하였다. 갈비뼈가 나갔는지 숨도 쉴 수 없었고 꿈쩍을 할 수 없었다. 조씨가 다시 박모씨를 죽이라고 협박해 내가 왜 아무 감정도 없는 그를 죽이냐고 하며 못하겠다고 했더니 또다시 둔기를 동원한 무차별 구타가 시작됐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뚫어 극심한 고통을 느꼈지만 그때부턴 아무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조씨는 내게 ‘그럼 대신 네가 죽어야 한다. 지금부터 다른 장소로 이송한다 3~4시간 걸릴 것이니 살고 싶으면 그 시간 안에 잘 생각하라’고 하면서 나를 차에 태웠다. 가슴과 손을 결박한 그 위에 다시 상반신을 쇠사슬로 묶고 자물쇠를 채우더라.”

-어디로 갔나.
“내비게이션을 보니 전주IC를 찍었다. 그날 밤 눈이 많이 내려 논현동에서 탈출을 감행한 기흥 휴게소까지 3시간이나 걸렸다.”

-기흥 휴게소에서는 어떻게 탈출했나.
“내가 탄 차는 그 쪽에서 동원한 4명이 타고 있었다. 조씨가 탄 차가 조금 늦었다. 합류를 위해 기흥휴게소에서 내가 탄 차가 잠시 기다려야 했다. 그 순간을 활용해 탈출했다.”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장정 4명이 감시했던 차량을 어떻게 빠져나왔나.
“이번 사건의 본질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대목이다. 조씨는 나를 납치할 때 국제PJ파 조직원을 동원하지 못했다. 교도소에서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경남 충무와 진해의 잡배 범죄꾼들을 부른 것이다. 그들은 무늬만 주먹이었지 내가 보기엔 전혀 숙달되지 않은 동네 양아치로 보였다. 조직 차원의 공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흥휴게소에서도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사달라고 했더니 내 말을 믿고 두 명이 물을 사러 갔다. 숙련된 애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행위다. 물을 사러 간 사이 뒷자리의 나머지 한명을 밀치고 탈출에 성공했다.”

-일부 언론은 식당으로 도망쳐 숨었다고 보도했다.
“(당치 않은 듯 웃으며) 휴게소로 들어가 주방부터 찿았다 주방의 칼을 찾기 위해서였다. 끝까지 추적할 경우 방어할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겁을 먹고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과 휴게소 직원들이 보고 있는데 숨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쇠사슬에 묶여 휴게소에 들어와 칼을 찾기 위해 황급히 두리번 거리는 나를 아마도 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경찰에 신고한것이지 내가 신고한 것이 아니다. 경찰이 왔을 때도 나는 강남사거리에서 지나가는 차량에 노상강도를 당했다고 했지 조씨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아마도 경찰에서 내가 조씨를 범인으로 말하지 않았기에 나를 감금 납치했던 사람을 탐문하는 과정에 사건 내용이 노출됐고, 그런 과정에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게 된 것 같다.”

-조씨가 왜 박 모씨의 살해를 요구했다고 생각하나.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른다. 나를 협박해 박모씨가 살해됐다면 평생 그 사실을 실토하지 못하리란 계산을 한 것이다. 정말 비열한 행위로 주먹 세계 안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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