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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대치동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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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내 이웃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십니까. 혹은 그들의 관심사가 뭔지 알고 싶으십니까.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중앙일보가 매주 강남을 속속들이 해부합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대치동입니다.

3주 연속 연재하는 ‘대치동 사람들’을 통해 진짜 속살을 만나보십시오.

학벌 사회서 생존하려면 꼭 '대치동'으로

우리는 왜 브레이크 없는 열차에 탔나

‘대치동 사람들’ 글 싣는 순서

1. 우리는 왜 브레이크 없는 열차에 탔나
2. 밖에선 이해 못할 그들만의 세상
3. 대치동 키즈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사교육 왕국이다. 1970년대 말 아파트가 처음 들어설 때 분양 받아 입주한 대치동 원주민족(族)부터 대치동이 뜬 후 자녀 교육을 위해 전세를 얻어 대치동 입성에 성공한 대전족(대치동 전세족), 대치동 밖에 살지만 아이를 대치동 학교와 학원에 실어나르는 대치소비족(대치원정족), 그리고 대치동에서 살다가 못 견디고 지금은 타 지역으로 튕겨나간 대타족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중심을 대치동에 두고 살아가는 학부모와 학원 관계자, 입시 컨설턴트 등 30여 명을 만나 대치동 삶에 대해 깊은 속내를 들었다.

메트로G팀=안혜리·이원진·김소엽·박형수·전민희·강나현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자녀 학년, 남편 직업, 본인 학력, 나이 등 모든 게 달랐지만 딱 한 지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대입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에 올라탔다”는 거다. 바깥 사람이 볼 때 위태롭기 짝이 없지만 대치동 사람들은 아무도 여기서 내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이 열차에 탈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대한민국을 옭아매고 있는 지긋지긋한 학벌사회를 살아내려면 대치동만 한 데가 없다는 이유다. 그들은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만이 신분 상승의 사다리에 오를 수 있는, 아니 최소한 우리 세대만큼의 사회적 지위라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10 여 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두 자녀 교육을 위해 지난해 대치동에 입성한 대학교수 이모(40·여)씨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누가 증명해 줬으면 좋겠다”며 “그러나 이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알 때까진 도저히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자녀 교육에 모든 걸 다 건 대전족은 필사적으로 사교육에 매달린다. 교육비에 모든 걸 쏟아붓기 때문에 노후 대비는 꿈도 못 꾼다. 미래를 아이 사교육에 저당잡힌 인생이다. 대치동 밖 사람들 눈에는 정말 ‘이상한 나라’다. 하지만 대치동 안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지난해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온 이모(42·여)씨는 좀 특이한 경우다. 대개 엄마가 닦달해 이곳에 오지만 이씨네 가족은 남편 정모(47)씨가 강력히 원했다. 중학교 때 공부를 곧잘 하던 아들 성적이 떨어진 게 계기가 됐다. 정씨는 “대치동에서 애들 대학 다 보낸 직장 상사가 ‘공부시키려면 대치동만 한 데가 없다’더라”며 당장 이삿짐을 싸게 했다. 처음엔 정씨도 주저했다. 하지만 “자식한테 하는 투자라고 생각하라”는 상사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정씨는 1997년 외환위기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실직자가 됐다. 지금은 한 대기업 차장으로 있지만 당시의 경험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 실직 동안 정씨는 신통치 않은 자신의 학벌 탓을 많이 했다. 그는 “학벌이라도 좋아야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털어놨다.

 정씨 월급은 대략 500만원. 그중 절반이 아들(17)과 딸(14)의 학원비로 나간다. 시어머니 몸이 불편해 매달 병원비까지 나가지만 사교육 비용은 도저히 줄일 수 없단다. 이씨는 “애 둘에 월 250만원이라면 아마 이 동네에서는 별로 많지 않은 금액일 것”이라며 “화곡동에 살 때도 애 학원은 보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화곡동도 나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은 곳인데 여기 와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며 “나는 너무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은데 정작 남편은 ‘애가 공부를 잘해야 나중에 우리도 편해진다’며 들은 척도 안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 가족뿐 아니라 대전족 대부분은 자녀 교육, 아니 사교육에 ‘올인’한다. 소득 대비 교육비 비중을 따져봤더니 대치1~2동은 45.8%나 됐다. 버는 돈 절반을 교육비로 쓴다는 얘기다. 나머지 절반으로 생활비 등을 쓴다. 노후를 위해 투자할 돈이 자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의 국내 가구 교육비 지출 보고서(2012년)를 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기준으로 교육 빈곤층, 소위 에듀 푸어(edu-poor)는 전국적으로 82만4000가구에 달했다. 대치동 대전족 상당수가 여기에 속한다.

 빈털터리가 되면서까지 왜 대전족을 고집하는 걸까. 대치동 사람들의 극성스러운 사교육엔 대치동 학교의 특수성이 한몫한다. 대치동 학교에는 공부 잘하는 상위권과 바닥을 깔아주는 하위권 학생만 있다. 중간은 없다. 중위권이 대다수인 다른 지역 학교와 비교하면 이상한 현상이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이지현(42·대치동)씨는 “시험을 치면 90점대, 아니면 40~50점대”라며 “그 사이의 어중간한 점수는 아예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 이유로 사교육 효과를 꼽았다. “엄마한테 제대로 사교육 도움을 받는 아이들은 상위권을 유지하지만 사교육 없이는 하위권에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남매를 둔 박은주(41·대치동)씨는 “대치동 엄마들은 아이들을 아무 학원에나 보내는 게 아니라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그걸 보충해줄 수 있는 곳에 보낸다”며 “무작정 학원 찾아가 ‘잘 부탁한다’는 엄마를 보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엄마가 학업적인 면에서 아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 승부를 걸 수 없는 곳이 대치동”이라며 “어중간한 시기에 와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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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치동 원주민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사교육을 시작해 체계적으로 장단기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전학 온 아이들이 원주민 아이가 축적해 둔 공부량을 단시간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대치동 엄마들은 “대전족을 고민하고 있다면 늦어도 초등학교 4학년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은영(42·대치동)씨는 “대치동 입성은 늦으면 늦을수록 따라잡기 어렵다”며 “워낙 선행학습이 센 강도로 진행되는 곳이기 때문에 중간에 전학을 오면 제 학년 수업 따라가기와 선행 사이에서 엄마와 아이 모두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더 무리를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강남구청 조사에 따르면 대치동 엄마는 남편과는 물론 자녀와의 관계가 강남 다른 지역 엄마들에 비해 좋지 않았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만족하는지를 물었더니 압구정동 엄마는 평균 4.34점(5점 만점)이었다. 그러나 타워팰리스 등이 있는 범 대치동인 도곡2동과 대치 1~2동은 각각 3.5점과 4.1점에 그쳤다.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한 만족도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자식 사이에 관계가 좋지 않다 보니 아이들은 고민이 생겨도 부모에게 터놓지 않는다. 고민을 상담할 대상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부모라고 답한 대치1~2동 학생은 13.9%에 불과했다. 도곡2동은 38.4%로 조금 높았지만 압구정동(62.8%)에 비하면 크게 떨어졌다.

 가족이 멀어질 지경이 되도록 아이를 사교육으로 내모는 엄마라니. 혹시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엄마가 많은 탓일까.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좋은 학벌은 기본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직업을 가진 엄마도 적지 않다. 학력 불문, 직업 불문, 엄마들은 대전족 입성을 위해 줄을 선다.

 대치 원주민족인 김모(48·여·대치동)씨는 “왜 다들 대치동으로 몰려오는지 모르겠다”며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다른 지역에 비해 사교육 시키기에 편리하고 면학 분위기가 월등히 좋은 건 사실”이라며 “하지만 대전족 엄마들의 과열경쟁 때문에 대치동 이미지가 너무 나빠졌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교사인 이모(41·여·마포구)씨도 올해 고등학생이 되는 딸(16)을 대치동 학교에 보냈다. 이씨는 “일단 대치동 학원에 보내놓으면 맞벌이 엄마로선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써도 된다”며 “학원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해서 엄마한테 그날그날 상황을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딜 가나 공부밖에 할 게 없다는 걸 아이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대치동에서는 ‘나’를 버리고 온전히 아이들에게만 매달려야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맞벌이 엄마를 위한 맞춤형 동네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전업주부가 하듯 아이를 일일이 체크할 수 없기 때문에 공부 외엔 완벽하게 ‘진공 상태’인 대치동이 최적이라는 것이다.

 의사인 백모(50·대치동)씨는 “맞벌이 엄마는 주변 엄마들에게 정보 얻기가 쉽지 않다”며 “대치동 주변 의사 엄마들끼리 여의사 커뮤니티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꼼꼼하게 아이의 공부 성향까지 분석해 주는 학원이 있어 오히려 불안감이 해소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원들이 아이의 이동경로를 실시간 문자로 보내주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며 “바쁜 엄마지만 아이의 성적이나 생활에 대해 꼼꼼히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자신의 직업과 대치동 교육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엄마는 대치동에서 주류는 아니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대치동 엄마는 “대전족의 성공은 엄마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고 말했다.

 물론 대가 없는 희생은 아니다. 아이들은 명문대, 그리고 졸업 후 전문직이라는 결과물로 엄마의 희생에 보답한다.

대치동 학원가가 진다는 얘기가 들려온다.그러나 대치동 사람들은 “뭘 모르는 소리”라고 말한다. 잘나가는 학원들은 여전히 북새통이다. 사진은 학원 간판이 빼곡히 붙어 있는 대치동 상가 건물. [박종근 기자]

 변희금(48·여·대치동)씨는 “남편이 주재원으로 나가는 바람에 온 가족이 에콰도르와 베네수엘라에 살다 처음 귀국해서는 분당에 살았다”며 “애들은 모두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잘하는데 분당에는 수준에 맞는 학원을 찾을 수 없어 4년 전 대치동으로 왔다”고 말했다. 당시 고1이던 아들은 대치동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적응을 잘한 덕에 성균관대 글로벌학부에 무난히 진학했다. 변씨는 “살아보니 대치동이 애들 공부 가르치기 가장 좋은 동네”라며 “어떤 수준의 애라도 여기서는 딱 맞는 레벨의 수업을 하는 학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잘 활용하면 되지 나쁘게만 볼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의사 김모(44·대치동)씨 부부도 비슷한 입장이다. 부부가 같이 교육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으며 중학생인 두 아들의 교육을 시키고 있다. 특이한 점은 사교육은 두 과목만 시키고 형제가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도록 하고 있다는 거다. 둘 다 대청중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주변 반응이 재밌다. 아내 전모(42)씨의 설명. “난 엄마들 모임 같은 데 잘 안 나간다. 애들이 사교육 별로 안 받고 공부 잘하니까 주변 엄마들 관심이 많다. 끊임없이 전화해서는 ‘아이 교육 잘못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애들이 나쁜 것도 미리 해봐야 한다며 ‘PC방에도 다니게 하라’고 조언한다. 자기 애들하고 같이 프로젝트에 끼어주겠다는 제의도 한다. 내가 잘못하고 있나 싶어 불안할 때마다 남편이 ‘휘둘리지 마라’고 중심을 잡아준다. 학원 순례하는 대치동 엄마들이 자기들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우리를 공격하는 거’라면서.”

 전씨는 “부부가 생각이 다르면 교육시키기가 정말 어렵다”며 “다행히 우리는 한마음이라 철학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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