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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법 통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제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비로소 마음놓고 나라말과 글을 쓸 수 있음을 진정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겼다. 말과 글은 민족의 긍지. 빼앗겼던 그것을 되찾은 기쁨에서 한글을 창제하신 선인들의 뜻을 한층 우러렀다.
그러나 한글은 해방 후 21년 간 가시밭길을 헤쳐왔고 그 시련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국민은 엄연히 우리 나라 말과 글을 쓰고 있음에도 학자들의 이견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떻게 쓰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저마다 구구하다.
한글은 근대적 학문체계로 다듬고 정리하길 다하지 못한 채 일제에 빼앗겼다가 되찾게된 까닭이다. 그 정리를 위한 시련을 해방 후에 겪는 것이다. 갖은 구박 속에서 한글을 지켜온 조선어학회 회원도 일단 정리기에 들어서자 서로 자기의견에 고집이 굳었다. 더욱 정부의 무 정견은 그들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논쟁에 휘말려 우리 글은 갈피를 잃게되었다. 말과 글은 정부의 것도 소수학자의 것도 아닌데-.
한글이 겪은 첫 시련은 이른바 「한글 간소화 파동」. 1953년 4월 국무총리 훈령으로 발한 『현행 맞춤법은 너무 복잡하여 사용하기 불편하니 간이한 구 철자법을 도로 사용하도록 하라』-곧 소리나는 그대로 적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이다.
이를 위하여 문교부에는 「국어심의위원회」가 특설되고 어용단체 「대한어문연구회」 등을 조직하는 한편 당시의 문교장관은 기어이 관철하겠다고 했지만 국민 대다수의 반대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1년 반만에 「보류」라는 말로 철회됐다.
한글분쟁의 다부진 물결이 밀어닥친 것은 1963년 5월.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학교 문법을 통일하려는 데서 일어났다. 당시 문법 교과서(검인정)는 최현배·이희승·이숭령·김윤경· 정인승 등 11명의 저자에 의한 9종. 이들 교과서가 각기 다른 용어와 내용으로 돼있는 까닭에 교사도 학생도 어떤 것이 맞는지 분간할 수 없어 한가지로 통일해야겠다는 것은 일의 당연한 추세다.
이 파동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면 학계의 새 일꾼인 소장 층의 대두에 미친다. 이때까지 국어학계서 떨친 것은 한글학회를 토대로 한 최현배씨 계열의 문법이다. 일찍부터 교과서 「중등말본」을 가지고 있던 최씨는 한글학회를 주도했고 또 8·15직후부터 53년에 이르는 수년간 그의 저서를 널리 펴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정인승·장하일제씨의 견해도 최씨와 대동소이하여 국어문법에 관한 한 「말본」 「맞춤법」 「이름씨」 「껌목법」하는 말들이 자연스럽도록 보급됐다.
그러나 뒤늦게 교과서를 낸 이희승·이숭령씨 등은 「이름씨」 「움직씨」하는 말 대신 「명사」 「동사」하는 한자 식. 해방 후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을 나온 소장학자들이 단연 스승의 견해를 따름으로써 「이름씨」와 「명사」는 비등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1958년 소장 층의 모임인 국어국문학회는 이희승·이숭녕·최현배·정인승 등 학계 원로를 초빙, 공개발표와 질의를 했다. 그리고 학교문법을 통일하라고 당국에 건의를 거듭하여 분위기를 조성했다.
62년 초 문법교과서를 안 쓴 사람으로 심의기구를 만들었으나 비난이 높아 해체. 다시 저자 8명, 비 저자 8명으로 「국어교육과정 심위」를 구성, 63년 7월 최종결정을 봤으나 막상 불을 퉁기는 대결의 도화선이 됐다. 거기에는 학설의 대립만이 아니라 가난한 학자들에게 이권이 결부된다. 교과서의 집필 및 채택여부가 관계되는 때문이다. 결정된 근3백 단어의 기본용어 중 말소리(음성)와 문장부호를 제외하곤 대다수가 한자 식. 그래서 지지와 반대의 양측은 지상논쟁도 모자라, 연대성명과 성명서를 내는 등 잇따라서 커다란 소용돌이를 남겼다.
결정 투표도 아슬아슬한 8대7. 소란과 우격다짐 속에 퇴장소동을 벌이었는가하면 통일안이 공고된 뒤에는 서로 각계각층을 동원, 연 인원 3천여 명이 서명했고 학회이름도 가지각색으로 등장했다.
최근 이러한 격돌은 훨씬 음성화한 느낌이다. 요즘 많이 생기는 이 방면의 학회, 연구회가 그것이다. 표면상의 취지는 연구와 친목이지만 내심세력(?)에 대한 집착이 없다할 수 없다.
심지어 「민족문화 협의회」까지 그 일환으로 보는 측도 있다. 한글파동은 잠정적인 일단락일 뿐이다. 한자 사용문제라든지, 외래어·표준말 등 구체적으로 해결된 것이 없으며, 현행 맞춤법에 대해서도 「역시 너무 어려워」 수정해야겠다는 주장이 나타난다. 국고로 운영하는 한글학회는 사계를 대표하지 못하는 형편이고 그밖에 중의를 모을 이렇다할 연구기관이 없다.
국어사전은 모두 제멋대로 이고. 또 다시 시련의 불씨를 키우고 있는 것이 한글의 오늘이다. <이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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