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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은 은둔의 담을 허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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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철호
논설위원

법정구속된 SK 최태원 회장의 비운은 단순한 개인적 사안이 아니다. 얼핏 보면 재수없이 걸린 듯 여겨질 수 있다. 검찰이 압수수색에서 사무실 금고의 175억원짜리 수표를 지나쳤다면 그냥 묻혀 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SK에 자꾸 불미스러운 일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우리 대기업 2, 3세들의 불안한 미래가 어른거린다.

 문제의 씨앗은 최종현 선대회장의 급서(急逝)로 잉태됐다. 폐암 발병 이후 손쓸 틈 없이 운명했다. 최태원 회장은 급하게 경영권을 승계받았지만 나머지는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지분율은 턱없이 낮았고 사촌 형제들과 복잡한 재산 분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물려받은 현금성 자산이 거의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준비 없이 ‘상속 절벽’에 선 것이다.

 최 회장은 물려받은 주식의 절반이 넘는 729억원의 세금을 냈다. 돈이 없어 5년간 분납해야 할 만큼 쫓겼다. 배당금을 죄다 쏟아붓고 변두리 주식까지 팔았으나 힘에 부쳐 막판에는 은행 대출에 기댔다. 한숨을 돌릴 무렵 덮친 소버린의 공격은 새로운 악몽이었다. 최 회장은 현금이 생기는 대로 필사적으로 SK 주식을 사들이며 경영권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분식회계와 비자금 사건은 여기서 파생된 부산물이다.

 SK의 비극은 다른 대기업 2, 3세들도 언제 마주할지 모를 위기의 단면도다. 최고 65%에 이르는 상속·증여세율, 그리고 일감 몰아주기와 편법 상속에 촘촘한 그물망이 드리우고 있다. 순환출자에도 언제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다. 고공행진하는 대기업의 시가총액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안정적인 지분을 물려주려면 출처가 입증된 깨끗한 돈이 그만큼 더 많이 든다는 이야기다. 정치권도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아니다. 몇 차례 선거가 반복되면 ‘대기업 때리기’에서 ‘대기업 빼앗기’로 넘어갈 기세다. 세상인심이 사나워졌다.

 돌아보면 대기업 창업주들의 사회적 접합면은 대단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언론 인터뷰나 기고문에 망설이지 않았다. 방송사 신년대담에 단골로 출연했고 일간지에도 자주 글을 썼다. 타계 직전에는 천주교 신부에게 24가지의 종교적 궁금증을 질문할 만큼 교류의 폭이 넓었다. 현대 정주영 회장도 사람 만나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신입사원들과 씨름판을 벌이고 격렬한 파업현장에선 노조와 서슴없이 맞짱을 떴다. 같은 시대 사람들과 함께 뒹굴며 어울린 것이다.

 요즘 대기업 2, 3세들은 사회와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신비주의를 고수하며 은둔의 담을 쌓고 있다. 주요 그룹의 구조조정본부는 갑자기 법무 기능이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느낌이다. 툭하면 “법대로 하자”는 쪽으로 기운다. 문제는 그 법이 대기업에 불리한 쪽으로 바뀌는 사회적 환경이다. 지금은 오히려 구조본의 정무 기능 복원이 절실하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법과 경영 효율은 당연히 따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 대기업들의 유례없는 성공 신화는 대단하다. 오너 경영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추진력이 큰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영실적이 좋아도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주식 지분만으로 지배하기는 무리다. 사회적 접합면을 늘리고 국민적 사랑을 얻어야 충분조건이 완성된다. 미국 포드 가문의 포드자동차 지분율은 3.2%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드차가 헤맬 때 헨리 포드2세를 강제로 예편시켜 해군 헬기를 투입해 회사로 실어 날랐다. 그는 국민적 기대대로 35년간 포드차 CEO를 맡아 경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도요다(豊田) 가문의 도요타차 지분율 역시 2%를 밑돌지만 4대째 경영을 지배하고 있다. 이 두 가문은 100년 넘게 시대를 호흡하며 역사를 이어왔다.

 영국은 홍콩을 차지할 때 조차(租借)기한을 99년으로 고정했다. 영국은 힘이 넘쳤고 중국은 시체나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1000년도 가능했지만 영국은 인간의 영역에 만족했다. ‘100년’은 신(神)의 영역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대기업들도 창립 60주년을 넘어 ‘백년 기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속 가능한 경영이 뒷받침돼야 넘보는 신의 영역이다. 아무리 지분이 많아도 사회적 미운털이 박히면 영생(永生)을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 첫 경보음을 SK 사태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다. 독창적인 경영철학과 기업문화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도요다와 포드 가문처럼 지분율을 넘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세워야 백년 기업을 도모할 수 있다. 우리 대기업 2, 3세들도 은둔의 담을 허물고 나와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이 철 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