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기자
요새 출판동네에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급의 기발함(!)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출판사가 있다. 영화 흥행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레 미제라블』을 낸 A출판사다. A출판사의 『레 미제라블』은 ‘○○대 불문학과 교수가 수 년간 공들인 완역’을 내세우지도 않았는데 한때 인터넷 서점 판매 순위 1위에 올랐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격경쟁력 덕분이다. B사의 5권짜리 『레 미제라블』 세트는 인터넷 서점에서 정가 6만1000원에서 10% 할인된 5만4900원에 판다. C사의 것은 4만4800원이다. 반면에 A사의 책은 한글판 5권과 영문판 5권 도합 10권짜리 세트가 정가 7만9000원에서 50% 할인된 3만9500원이다. 권당 4000원이 채 안 되는 셈이다.
현행 도서정가제로는 불가능한 ‘후려치기’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궁금증은 책 안쪽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보면 풀린다. 다른 『레 미제라블』처럼 ‘교양-문학’이 아닌 ‘실용-어학’으로 한국문헌번호센터에 등록이 돼 정가제 적용을 피해간 것이다. 출판사가 분류를 스스로 정해 신청하는 시스템인 점, 1년에 등록되는 책이 워낙 많다 보니 센터 측에서 관리가 어려운 점 등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B사와 C사는 얼마든지 싸게 공급할 수 있는데도 괘씸하게 독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걸까. ‘책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싸게 사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반값 덤핑을 마냥 반길 일이 아니란 건 조금만 따져보면 안다. A사는 과거에도 다른 책으로 날림 번역 구설에 오른 전력이 있다. 독자들이 인터넷에 영문 원문과 다른 출판사 번역, A사 번역을 비교해 올려놓았는데 정도가 좀 심하다. 원문을 뭉텅뭉텅 잘라낸 데다 다른 출판사 번역을 가져다 윤문한 혐의가 짙다는 지적이다.
지나치게 가격을 낮추려면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권당 4000원이 안 되는 가격에 책을 만들려면 제대로 된 번역가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소비자들은 품질이 저하된 책을 사는 것이다.
이런 책을 대형 서점들이 앞다퉈 파는 건 출판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일이기도 하다. 가격 낮추기를 위한 출혈경쟁은 규모가 있는 출판사는 그나마 버티지만 군소 출판사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최근 출판사들과 인터넷 서점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도서정가제 강화도 이런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인터넷 서점들은 법으론 10% 할인이지만 쿠폰과 적립금, 패키지 판매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책을 싸게 팔았고, 독자들도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물론 책값에 거품이 있다면 마땅히 빠져야 한다. 독서문화 부재, 출판 불황이 전부 인터넷 서점 탓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무조건 싸게 파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출판계의 목소리도 귀담아들을 구석이 많다. 싼 것만 찾는 통에 산업이 골병든다면 더욱 그렇다. 지나치게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