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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빈자리 어딘가에 사랑에 빠진 유령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물랭루주'를 봐라. 키스의 정답이 거기에 있다."

연출자 아티 마셀라의 닦달에 이혜경(30) 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키스 신에도 정답이 있다니…. 대충 하면 되는 거 아냐. 멀리(객석) 에서는 보이지도 않을텐데."

그러나 연습실에서 이런 '대충'이란 투덜거림은 통하지 않았다. 입술이 서로 닿는 넓이와 분위기까지 "진짜처럼 하라"는 연출의 주문에 이혜경도 어쩔 수 없다. 숨을 가다듬고 윤영석과 키스를 거듭하길 수차례. 그제서야 연출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LG아트센터에서 막판 개막 준비에 한창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연습 풍경 중 한 장면이다.영화 '물랭루주'에서 창부 샤틴(니콜 키드먼) 과 젊은 시인 크리스티안(이완 맥그리거) 이 하는 그 정열적인 입맞춤. 이게 공연 중 이혜경과 윤영석이 참고해야 할 '교과서'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각각 크리스틴과 팬텀(유령) 역을 맡았다.

"그래도 이상한 감정이 전혀 안드는 것을 보면 제가 배우는 배우인가 봐요." 이혜경의 입맞춤 소감이다. 상대역 윤영석은 이씨 남편의 대학(추계예대) 동기로 진작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지금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아니 꿈 속까지 하루 종일 크리스틴으로 살고 있는 뮤지컬 스타 이혜경. 그녀에게는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신데렐라'라는 표현이 딱 맞다. 뮤지컬 배우 경력 5년 만에 누구라도 부러워할 최고 화제작의 주인공이 됐으니 말이다.

'오페라의 유령'(제미로와 영국의 RUG 공동제작) 은 제작비가 물경 1백억원에 이르는 '뮤지컬 블록버스터'다. 이혜경은 여섯 차례의 오디션 끝에 골라낸 진주 중의 진주다.

"고된 연습에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해 있어요. 보약이라도 먹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막상 무대만 바라보면 흥분이 돼요. 주인공 낙점 소식을 듣고 그 흥분으로 밤샘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느낌이 아직도 식지 않은 이상 기어코 사라 브라이트먼의 명성을 능가하고 싶습니다."

브라이트먼은 1988년 '오페라의 유령'의 영국 초연 때 크리스틴 역을 맡은 인물이다. 당시 작곡가인 '뮤지컬 황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아내였으며, 상대역인 마이클 크로퍼드와 함께 이 작품의 세계적인 성공을 가져온 일등공신이다.

브라이트먼이 그랬듯이, 이혜경도 혜성처럼 나타났다. 오디션 과정을 통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춰진 보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무명에서 한창 발돋움하던 시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 발탁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격이었다. 성신여대 성악과를 졸업한 이혜경은 96년 서울시뮤지컬단 오디션을 통과해 줄곧 그곳에서 활동했다.

"노래와 대사는 거의 다 마스터한 상태입니다. 다만 춤 동작이 마음먹은 만큼 안되네요. 연습에서 1백%를 소화했다 해도 공연 때는 80%밖에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오페라의 유령' 오프닝 신은 발레 군무(群舞) 다. 여기서 크리스틴은 여러 발레 동작을 선보여야 하는데 그게 영 걱정이란다. 2막 첫 장면에도 가면무도회(매스커레이드) 가 들어 있다. 이혜경은 "기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보였다. '오페라의 유령'의 연습을 통해 이혜경은 이미 뮤지컬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뮤지컬에서 노래.무용을 능가하는 제1의 요소는 다름아닌 연기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노래만 잘 하면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연기적인 호흡이 섞여있지 않은 노래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연기로 풀어내는 노래와 춤, 그게 뮤지컬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이혜경은 자신이 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벨칸토라고 하나요. 오페라는 늘 그런 정제된 소리를 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뮤지컬에는 그런 '정답'이 없어요. 연기나 극의 상황에 따라 소리와 발성.톤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이혜경은 서울 송곡여고 3학년 때 성악을 배웠다. 시작은 비교적 늦은 편이다. 재수하면서 선배 언니의 가르침을 받고 나름대로 노래가 뭔지를 깨우쳤다. 대학졸업 직전 뮤지컬단에 입단해 기성 오페라 무대는 서본 적이 없다. 이런 이력 때문에 이혜경은 뮤지컬을 얕보는 오페라계의 눈총을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녀는 "뮤지컬 배우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혜경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제법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한네''지붕 위의 바이올린''포기와 베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신라의 달밤' 등이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시뮤지컬단 작품이다.'피가로의 결혼'으로 99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신인상을 타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제가 부르는 노래 중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제일 좋아합니다. 극중 오페라 아리아로 유령을 꾀는 섹시한 노래입니다. 유령이 작곡한 곡인데, 물론 저는 그런 사실을 모르죠. 저는 이 노래를 제 운명에 빗대어 부릅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길이 제 앞에 놓여있으니까요."

*** 공연메모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이혜경.김소현) 과 팬텀(윤영석.김장섭) ,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젊은 귀족 라울(유정현) 의 삼각사랑이다. 여기에 감초 같은 두명의 극장 경영자 피르맹(김봉환) 과 앙드레(서영주) 가 가세한다. 극중 오페라의 주인공 칼롯타(윤이나) 와 피앙지(진용국) 도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 이들이 엮는 격정의 사랑 이야기는 이 작품을 뮤지컬 고전 중의 고전으로 끌어올렸다.

이 작품처럼 드라마와 스펙터클(무대장치와 의상 등) 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공연예술은 흔치 않다. 지금까지 14개국에서 제작됐으며 30억달러(약 3조6천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추산관객만도 6천만명에 이른다.

웨버의 프로덕션인 RUG가 제작의 전 공정을 책임져 오리지널과의 질적 수준 차를 없애려고 애썼다.

12월 2일~2002년 6월 30일 LG아트센터.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3시.8시, 일 오후 2시.7시, 월 쉼. 02-200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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