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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 끝도 없는 그리운 이름들 흑백 사진 같은 추억들 켜켜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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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호 26면

저자: 김용택 출판사: 문학동네 가격: 각권 1만3500원

‘대중’은 대도시의 산물이다. 20세기 초 전쟁을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집단이 시초였다. 산업 자본주의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온 그들의 삶은 이전과 달랐다. 이유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치장에 공들이고, 남의 뒤를 캐는 일에 몰두했다. 무엇보다, 속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아웃사이더’로 살아갔다. 새로움을 갈구하는 모더니스트들인 동시에 정체성 없이 부유하는 도시인들이었다.

산문집『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시인 김용택이 펴낸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는 그 대척점에서 쓰인 책이다. 어느 강 마을의 60년 역사와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한 편의 다큐처럼 기록한다. 책은 시인이 나고 자란 진메 마을 공동체가 어울려 사는 법을, 마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품은 숱한 고민과 반성을, 수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온 아이들 이야기를 빼곡히 담는다. 시인은 『내가 살던 집터에서』와 『살구꽃이 피는 마을』 두 권에다 기존에 썼던 섬진강에 관한 글들을 더해 전 8권으로 이를 완성했다(3~8권: 『섬진강 남도 오백 리』 『 진메 마을 진메 사람들』 『같이 먹고 일하면서 놀았다네』 『창우야 다희야, 내일도 학교에 오너라』 『김용택의 교단일기』『꽃이 피는 그 산 아래 나는 서 있네』).

서문에서도 이미 밝혔듯, 1권 『내가 살던 집터에서』는 전체 8권을 이해하는 길잡이다. 진메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들이 소개된다. 한수 형님, 삼쇠 양반, 용수 형님, 암재 할머니 등 그간 시인의 글 속에 숱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들이다.

설명은 지나치리만큼 상세하다. 펜과 종이를 들고 가계도를 그려도 됨 직하다. 가장 오래 살아온 한수 형님의 큰누나는 시인의 당숙모가 되고, 시인 작품에 등장하는 ‘댕민댁’은 또 그 한수 형님의 어머님이기도 하다. ‘현이네 어머니는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시의 현이네 어머님은 정규 아재의 아내인데, 그 집으로 시인의 둘째 동생이 시집을 간다. 그러니 익명은커녕 ‘뉘 집 숟가락·젓가락이 몇 개인지’를 아는 건 당연지사다.

어찌 사람만 해당되랴. 진메 마을에는 무명의 자연에까지 이름이 달린다. 논의 모양에 따라 ‘자라배미’ ‘버선배미’라는 명칭이, 앞산의 경사진 산비탈에는 ‘하산길’이, 동네 앞산은 ‘장산’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하산길 바로 옆 산비탈인 ‘꽃밭등’처럼 시에 등장하는 소재도 한둘이 아니다.

이들을 숙지했다면 속도 내기가 쉬워진다. 2권 『행복한 살구꽃 마을』은 소설 ‘소나기’처럼 아련하다. 등교 때마다 코를 킁킁거리게 만들던 더덕 냄새, 교장 선생님의 일장 연설 뒤에 배급되던 우유 가루, 가슴 콩닥거리며 여학생과 우산을 처음 나눠 쓰던 추억 등 흑백사진 같은 추억들이 켜켜이 담겨 있다.

완독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가령 2권 말미쯤 독백하듯 열거된 단어들을 눈여겨보자. 시인은 ‘부르면 한도 끝도 없이 따라 나오는 그 그리운 이름들’을 다시 불러 모은다. 깍쟁기, 애기지게, 얌쇠 양반, 풍언이 아재, 구장네 솔밭…, 무려 195개다. 문득 자문한다. 지금, 나라면 떠올릴 이름들이 몇 개나 될까. 그는 그리워할 수 있어 행복한 섬진강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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