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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 원길’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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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읽는 데 적당한 나이가 따로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왠지 『주역(周易)』만큼은 나이 오십은 지나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나온 삶의 궤적을 자기 내면의 깊이만큼 반추하며 또 앞으로 살아갈 생의 궤도를 미루어 짐작하고 싶은 욕망이야 누구에겐들 없겠느냐마는 ‘인생 100세’ 시대라고 흔히 얘기하는 요즘 같은 세월엔 그래도 절반은 살아봐야 『주역』 읽을 번호표가 쥐어지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 『주역』의 ‘역(易)’은 ‘변화’를 뜻한다. 그래서 주역을 영역한 책이름이 『The Book of Changes』 곧 ‘변화의 책’이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주역을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고, 그만큼 가볍지 않고 무거운 것이리라. 두려운 까닭은 그것이 무슨 비기참서(秘記讖書)여서가 아니라 ‘때’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나아가야 할 때, 머물러야 할 때, 물러서야 할 때는 물론이고 계절의 춘하추동이 있고 만물의 생로병사가 있듯 인생에서 움터야 할 때, 껍질을 벗어야 할 때, 자라고 키워야 할 때, 묵혀야 할 때, 유지하고 지켜야 할 때, 내려놓아야 할 때, 썩어지고 사라져야 할 때를 마주한다는 것은 그 순간순간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거기 담긴 뜻이 천근만근 무거울 수밖에! 게다가 ‘천(千)주역 만(萬)주역’이란 말처럼 주역은 읽는 이의 눈 맑은 정도에 따라 달리 읽힌다. 그만큼 그 자체가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책이다.

 # 물론 『주역』은 단순히 점치는 책이 아니다. 다만 변화하는 때와 그 원리를 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오묘한 변화의 원리를 어찌 감히 안다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깊이 침잠해 더듬어 보는 것일 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대선 기간 중 김지하 시인을 만나 ‘지천태(地天泰)’를 말한 바 있다. 지천태란 주역에 나오는 64괘 중 11번째 괘를 이름이다. 한마디로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되듯 소통하고 어우러져 크게 안정되고 두루 편안함을 이르는 것이다. 더구나 남성을 하늘에 비유하고 땅을 여성에 비유하기에 ‘지천태’엔 여성이 극상의 리더가 된다는 함의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여성의 남성에 대한 우위’ 같은 서열 관계로 보는 것은 하지하(下之下)의 눈이다. 오히려 지천태란 조화의 극상으로 천지개벽과 같은 것이다. 가부장적 사유 체계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던 이 땅에서 미국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 자체가 기실 엄청난 혁명이지 않겠는가.

 # ‘지천태’는 8괘 중 ‘곤(坤)’괘의 극단이다. 그 곤괘 본문에 ‘황상 원길(黃裳 元吉)’이란 구절이 있다. 직역하자면 “황색 치마가 으뜸으로 길하다” 정도이겠지만 그것만으론 감조차 오지 않기에 나름 그 함의를 작금의 때에 맞춰 풀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황(黃)’은 단지 ‘누르다’는 색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행의 방위 개념상 정중앙에 해당하고 더 나아가 중용(中庸)의 덕, 중도(中道)의 길을 함축한다. 아울러 ‘상(裳)’은 크고 화려한 치마를 뜻하기에 널리 크게 품어내는 형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황상’이란 한가운데에서 중용의 덕과 중도의 뜻을 치마폭처럼 널리 펼치는 모양을 담은 형국이고, 이는 시쳇말로 곧 대통합, 대탕평을 이름 아니겠는가. 나아가 그것이 ‘원길’이라 함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으뜸으로 길하고 좋다는 뜻이 담겼다. 그리고 이것이 지극하면 ‘지천태’의 세상과 맞닿게 된다는 것이지 않겠는가.

 # 이제 새 정부의 조직개편 윤곽도 드러났고 본격적인 인사와 인재 배치의 때다. 대통합, 대탕평이 어찌 펼쳐질지 세간의 눈과 귀가 온통 쏠려 있다. 하지만 가장 큰 탕평은 지역 안배나 서열 파괴가 아니라 국민을 살맛 나게 하는 거요, 국민 모두가 신바람나게 만드는 거다. 박 당선인의 큰 폭 치마가 일으킬 신바람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