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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화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반백을 넘어 백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제자들의 연주회에 이따금 얼굴을 내어놓거나 아니면 자택 (서울필동2가20) 음악실에서 주2회씩 제자들의 「레슨」을 지도하는 일외는 거의 공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이 악단의 원로 안병박씨 (규) .
『6·내때잃은 그악기에 대한 추억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제자들(그들은 이제 모두 악단의 중견이지만)도 모두 간직하고 있지요』-그는 그악기를 잃은 슬픔을 요즘은「레슨」외는 작곡으로 달랜다고 했다. 주로 예술가곡과 실내악작품을….『그러나 작품속에「나의 세계」 「나의 악상」이 아직 구체적으로 부각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안씨가 「바이얼린」을 시작한것은 10세때, 우리의 양악년륜과 거의 맞먹는해다. 당시 구한국 군악대 장백우종씨의 알선으로 우리나라에 양악을처음 소개한 독일인 「에커트」씨를 알게되고 그의 권유에 의해 「바이얼린」 이란 악기를 처음 손에 들었다.
첫독주회는 그로부터 3년후, 13세때.
그는 양정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만하더라도 신통한 「바이얼린」 선생이 없었다. 백계노서아인 「유겐크라인」「알렉산더· 모귀레브스키」두선생 밑에서 조수로 있으며 한편으로는 4중주단을 조직, 방송연주등을 활발히 가졌다. 대망의 독일유학의 길에 오른것은 1934년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베를린」국립음악대학에서 서구의 정통적인「아카데믹」한 연주법과 「바이얼린」제조법을 아울러 배웠다. 바로 명기의 주인공 「아르멘노이만」교수에게서‥. 1938년 그가 다시 미국유학을 뗘나려고 할때 노교수는 그가 가장 아끼던 악기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평생 자기를 대하둣 하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그러나 미국유학의 꿈은 2차대전의발발로 깨지고 말았다.
안씨는 그악기 하나만을 소중히 간직한채 귀국했다. 신경교향악단에서 악장겸 독주자로 그를 초빙한 것은 그이듬해.
해방후 안씨는 연악원을 창설, 부모의 악단에 씨를 뿌리는한편 많은 후배들을 길러냈다.명기 「아르멘노이만」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6·25는 그의 분신이며 생명인 악기를 앗아갔고 그때부터 그는 그추억때문에 무대에도 서지않고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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