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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최고의 득점 기계, 카림 압둘자바

중앙일보

입력

박빙의 승부에서 카림 압둘자바의 소속팀이 절실히 득점을 원한다면 공이 갈 곳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대팀은 다 알고있지만 압둘자바의 손끝에서 떠난 공은 활과 같은 멋진 곡선과 함께 이미 림을 통과하고 있다. 누구도 압둘자바의 슛을 막지 못했고 또한 압둘자바처럼 자신을 한가지 모습으로 특징짓지도 못했다.

‘스카이 훅 슛’으로 대변되는 압둘자바의 슛은 재론할 여지없이 농구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효율적인 무기다. 본인은 “매력이 없다”고 했지만 LA 레이커스에서 그를 지도했던 팻 라일리 감독은 “스카이 훅 슛은 모든 스포츠에서 그 어떤 선수도 보여주지 못한 가장 위대한 무기임에 틀림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카이 훅 슛’과 함께 압둘자바는 2미터 19센티의 신장으로 센터로서의 우아함과 민첩함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보여줬다. 그는 전투와 같은 골밑싸움을 하면서도 요가와 적절한 체중조절, 영악한 플레이로 험한 NBA코트에서 센터로 42살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압둘자바는 1947년 4월 16일 뉴욕에서 ‘페르디난드 루이스 알신도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릴적부터 키가 컸던 그는 뉴욕 메모리얼 고등학교 재학시절 팀의 71연승으로 이끌며 두각을 나타냈고 졸업 후 명문 UCLA로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압둘자바를 당할 사람은 없었다. 신입생이 학교대표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연맹의 제약 때문에 벤치에서 1년을 보냈지만 압둘자바의 기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1967년과 69년 스포팅 뉴스, 미국언론협회, AP, 미국농구기자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또 67년부터 69년까지 3년 연속 NCAA 토너먼트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물론 이 기간동안 팀은 매년 ‘3월의 광란’에서 최종 승자가 됐다. 압둘자바가 UCLA에 있는 동안 팀은 88승 2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기록했고 그는 대학시절 평균 26.5득점, 15.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카이 훅 슛’도 대학시절 만들어졌다. 신입생 때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 압둘자바의 슛 곡선이 완만하다고 생각한 존 우든 감독은 좀더 포물선이 큰 슛을 익히도록 조언했다. 그 결과 완벽한 ‘스카이 훅 슛’이 탄생했다.

졸업 후 밀워키 벅스에 의해 전체 1순위로 지명된 압둘자바는 데뷔 첫해인 69-70시즌 신인왕을 거머쥐며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지구 2위로 끌어올렸다. 다음해에는 새롭게 팀에 합류한 오스카 로버트슨과 함께 벅스에 첫 우승의 감격을 안겼다. 하지만 순간의 영광뿐. 벅스는 이듬해부터 다시 중위권으로 떨어졌고 압둘자바는 74-75시즌 후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레이커스로의 이적. 레이커스에서의 선수생활을 압둘자바를 리그 최고의 센터로 성장시켰다. 매직 존슨과 호흡을 맞춘 압둘자바는 79-80시즌부터 88-89시즌까지 10년 동안 레이커스를 8번이나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시켰고 5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88-89시즌 후 20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친 압둘자바의 은퇴는 NBA에서 한 시대의 페막과 같았다. 압둘자바는 통산 38,387(평균 24.6)득점, 17,440(평균 11.2)리바운드, 3,189블록슛을 남기고 코트를 떠났다. 그는 1.560경기에 출장했고 787경기 연속 두자리수 이상을 득점했다.

압둘자바는 은퇴 후 엔터테인먼크 관련 사업에 종사하면서 “농구전도사”로서 활동했다. 또한 기아와 문맹 퇴치에 앞장서며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기회를 아끼지 않았다. 1995년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Joins 금현창 기자<lafirst@joins.com>

◇ 미국프로농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인스 스포츠 NBA 섹션에서
(http://sports.joins.com/basket/nba/nb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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