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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결수’가 보여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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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연인 관계인 남녀가 번갈아 기억상실증에 걸려 서로의 좋지 않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은행에서 로또 당첨금을 받아 나오던 길에 벼락 맞아 죽을 확률쯤 되려나. 아마 내가 다니는 회사 오너 아들과 일하다 사랑에 빠져 결혼할 확률과 비슷하지 싶다.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KBS 드라마 ‘착한 남자’에서 벌어졌던 상황이다.

 작품성 대비 시청률로 따졌을 때 ‘착한 남자’는 지난해 가장 과대평가된 드라마 중 하나였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좀 너무했다. 우연과 억지 남발 등 한국 드라마의 병폐가 종합선물세트처럼 빠짐없이 구비됐다. 반면에 ‘저평가 우량주’라고 한다면 1일 종영한 JTBC 드라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우결수)’를 꼽고 싶다. 종편 채널이라는 태생적 불리함이 없었다면 훨씬 더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할 만한 콘텐트였다. 한 시청자는 ‘우결수’ 마지막 회 방영 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자기복제와 시청률 연민의 늪에 빠진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들은 당장 ‘우결수’를 복습하라. 그것이 새해의 첫 예습이 될 거다.”(진명현 KT&G 상상마당시네마 프로그래머)

 현실과 상호작용이 활발할수록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브라운관 너머 성찰의 세계로 이끈다. 문화상품이 종종 핸드백이나 주방세제와 달리 유의미하고 유목적적인 소비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국 중산층의 결혼 풍속도를 보여준 ‘우결수’의 강점은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선 현실성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왜 평범한 남자와 여자가 이토록 결혼하기가 어려운지를 중산층의 속물성, 빈부격차가 심화된 시대 분위기와 촘촘히도 연결지었다. ‘라면과 사랑은 다시 끓일 수 없다’는 홍보 문구가 대표하듯 상투적이지 않은 ‘대사발’은 회가 거듭될수록 ‘작렬’했다. 출생의 비밀, 배신과 불륜, 불치병과 시한부 인생 등 한국 드라마가 곰탕 우리듯 우려먹던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작진이라고 쉽게 가는 법을 몰랐을까. 알고도 가지 않은 남다른 부지런함 덕일 것이다.

 지금까지 방송가에선 ‘막장 드라마 흥행불변의 법칙’이 통했다. 막장 드라마는 욕은 먹지만 시청률이 보장돼 저비용·고효율의 대명사로 불렸다. 드라마의 비현실성은 대리만족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졌고, ‘욕해도 본다’는 방송 관계자들의 게으른 믿음은 드라마 품질을 수준 이하로 끌어내렸다. “TV 속 재벌 2세가 동네 유기견보다 많아졌다”는 비웃음을 사는 게 한국 드라마의 현주소다.

 이젠 우리 드라마도 대중문화 하향평준화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벗을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작가 한 사람의 균형잡히지 못한 가치관과 협소한 세계관에 휘둘려 비상식적 상황을 남발하는 괴(怪)드라마는 새해엔 그만 보고 싶다. 게다가 드라마는 이제 한류의 대표선수 아닌가. 세계가 드라마란 교재로 한국 사회와 문화를 배울 텐데 지속적인 교재 업그레이드가 뒤따라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