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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가 최고의 한류(韓流)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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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한류(韓流)는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K-POP도, 대장금도 아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최고의 한류다. 그 가운데 무수한 이가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화는 중국이 경외하는 업적이다.
지난 18대 한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날 홍콩 봉황망 홈페이지에 한 편의 글이 올라왔다. 제목은 ‘한국민주진화사(韓國民主進化史, http://blog.ifeng.com/article/21981163.html)’. ‘풀뿌리 재주꾼(草根才子)’이란 수식어가 붙은 중졸 시사평론가 두쥔리(杜君立)의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동아시아 유교 문화의 영향이 강한 한국에서의 여성대통령 선출은 인종차별이 여전한 미국에서 오바마 흑인 대통령 당선보다 더 역사적인 ‘사변’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더불어 고대 한중관계사로부터 시작해 근·현대 한국의 민주화 여정을 분석했다. 특히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의 활약을 자세히 묘사했다.

한국은 중국과 춘추전국시대, 한나라의 문화를 공유했지만, 중국이 “수치심과 죄의식이 결핍되고 만족할 줄 모르며 폭력을 맹신하는” 몽고와 여진 오랑캐의 기나긴 지배를 받은 반면 한국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고대 중국인도 갖고 있었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돈에도 타락하지 않고, 가난도 바꿀 수 없던” 정신을 보존했으며 중국에서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두쥔리의 나이는 불혹(不惑), 중농 출신의 자칭 농민공이다. 기계수리, 용접공을 하다가 2003년부터 습작을 시작해 2008년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유명 시사평론가로 필명을 날렸다. 『직업인격』, 『역사의 디테일-세계를 바꾸는 물질적 동인』, 『1776: 건륭41년』 등의 저서가 있다. 거의 글이 인기를 끌자 유명 신문사가 앞다퉈 그의 문화·경제·사회·역사 평론을 게재하면서 두쥔리는 중국 평론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과 1989년 천안문사건을 비교한다. 중국의 더딘 민주화를 비판하고 한국의 업적을 찬양한다. 그의 글 가운데 전반부와 후반부를 소개한다.

두쥔리(杜君立)

2012년 12월19일 제18대 한국 대통령 선거 결과 박근혜가 신임 대통령에 선출됐다. 한국 역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됐다. 이번 선거 결과의 역사적 의의는 전형적인 동방 전통 남권사회에서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백인 주류의 인종차별이 여전한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 오바마 당선과 마찬가지다. 이는 민주제도 아래의 직접 선거를 시행하는 현대 공민이 이미 이성과 성숙으로 내심의 오만과 편견을 완전히 극복했음을 설명한다.
선거과정에서 한국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박근혜의 다음 경선 선언은 무수한 한국 공민을 감동시켰다. “나는 부모가 없습니다. 남편도 없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국가가 나의 유일한 봉사하고 싶은 대상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장년인은 박근혜에게 표를 던졌다. 50년전 박근혜는 그들 마음 속의 ‘공주’였다.

“아버님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도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9월 박근혜는 부친의 집권시기 발생한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아버지가 민주를 파괴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당수를 맡던 기간 그녀는 당사 건물을 팔아 ‘빚을 갚고‘, 전국을 누비며 ‘회개’했으며, 천막 당사를 세웠다. 그녀의 성의로 한국 민중의 신임을 다시 얻었다. 한국의 언론은 독신인 그녀를 ‘한국과 결혼한 여인’이라고 말한다. 60세의 단발 ‘3무 여인’은 노련하게 자신했다. “한국 정치권의 남자 정치를 타파하겠다”고. 그녀의 꿈은 끝내 실현됐다.
전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의 당선은 사람들에게 쉽게 고대 전통 황제권의 세습제를 상기시킨다. 사실 이는 완전한 오해다. 최근 중국 CCTV가 일본 인기 만화 명탐정 코난을 등장시켜 일본 정치권의 세습제를 비판한바 있다. “정치가의 아들은 커서도 정치가, 사장 아들은 여전히 사장이다. 이런 세습제는 인류의 잘못된 역사가 끊임없이 재연되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못 고치고 있다”

사실 민주제도 아래의 세습과 전제제도 아래의 세습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민중의 인정과 허가를 받은 것이요, 후자는 완전히 부모 권력의 영향이지 민중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다. 민주선거제도는 완전히 합법성 위에 세워졌다. 선거는 공민이 공권력을 부여하는 행위다. 선거가 직접 정치가의 정치 앞 길을 결정한다. 정치가는 공개 선거를 통해서만 합법적인 권력을 획득한다. 이는 비밀리에 공권력을 사적으로 주고받는 전제세습과 천양지차다. 민주제도 아래에서 정치가는 반드시 민중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원칙은 중국 고대인들이 숭상했던 ‘현명한 인재를 추천한다(擧賢)’, ‘밖으로는 원수를 피해 뽑고, 안으로는 친인척을 피해 등용한다’는 원리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재능이다. 고대 전통적인 권력 세습제 아래에서 권력은 세습됐고, 혈통은 권력 유통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법칙이었다.
만일 현대 민주법리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공민투표선거를 거치지 않은 사적으로 받은 권력은 모두 비합법적이요 세습제 안에 포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헌정체제 아래의 군주제도와 전통적인 전제황제권은 완전히 다르다. 전제는 현대 정치문명의 체현으로 국가권력은 민중에 속하고 군주는 단지 국가의 상징에 불과하다.

장첸판(張千帆) 베이징대 법대 교수는 일찍이 “선거는 일종의 이익대표시스템이다. 유권자는 자기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원을 뽑고, 의원은 다수의 유권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률을 제정해 사회를 통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선거는 공민의 상징이며, 공민의 투표를 통해 국가의 통치권이 나온다. 선거가 없으면 공민도 없다. 단지 밥만 먹고 일하고 숨쉬는 노예들만 있을 뿐이다. 전통적으로 이들을 ‘라오바이싱(老百姓)’이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공민과 선거는 현대의 상징이다. 이는 전통 제국시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일 민주헌정이 없으면 공개선거도 없다. 일체의 권력이 공민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면 그러한 국가에 만일 군주가 없고 세습이 없더라도 민중은 여전히 국가의 노예에 불과하다. 이러한 국가는 사실 극소수 음모가의 사적인 재산에 불과하다. 추장제도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이런 전제체제 아래에서 군주전제와 세습은 진정한 죄악이다. 정치는 완전히 폭력과 혈통에서 나오며 정의와는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다.
일본에는 군주(천황)이 있지만 현대민주국가다. 북한에는 군주가 없지만 의심할 바 없이 고대제국이다. 같은 세습이지만 한국과 북한은 같이 논할 수 없다. 박근혜가 계승한 것은 능력이요 김정일이 계승한 것은 권력이다. 민주와 전제, 문명과 야만, 현대와 고대. 같은 한반도에 나온 선명한 대비다.
1.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주 무왕이 상나라를 토벌하자 걸왕의 형제 기자는 한반도로 망명해 ‘기자조선’을 세웠다. 이후 주나라가 조선을 승인해 제후국이 됐다. 이는 한국 역사의 중요한 기원이다. 서한 초 ‘8왕의 난’ 당시 연왕 노관(盧?)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자 휘하의 장수 위만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입 B.C. 194년 기자조선을 물리치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B.C.109년 한무제가 5만 병력을 이끌고 산둥반도를 출발 조선을 공격 ‘위만조선’을 물리치고 ‘한사군’을 세웠다. 한반도는 철저히 중국화됐다. 한제국이 무너지고 중원이 북방유목민에게 공략당하자 유민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갔다(『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인종학적으로 볼 때 한국인은 중화인의 한 분파다. 중국이 수 세기 동안 몽고 타타르, 여진 타타르의 지배를 받은 것과 비교할 때 한국(조선)과 중국은 서로 비슷한 문화 인식을 갖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근대 중국이 야만민족의 폭력에 능욕과 노예 생활을 겪는 동안 사람들은 한국에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돈에도 타락하지 않고, 가난도 바꿀 수 없던" 옛날의 중국을 찾을 수 있었다. 2005년 한국이 등재 신청한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의 '인류전통무형유산'으로 선정됐다. 단오의 기원은 중국이다. 만일 중국문화가 춘추전국시대에 탄생했고, 전한 후한 시대에 성숙했다고 하면 한국은 가장 많은 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전형적인 예는 '한성(漢城)'이다. 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실이다. 심지어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는 완전히 중국 전통문화의 전형과 일치한다.

4세기 한반도는 삼국시대에 진입한다. 이 후 2000년 동안 김씨의 신라, 왕씨의 고려, 이씨의 조선이 한반도를 통치했다. 명조 초 고려 장군 이성계가 병변을 일으켜 고려국왕을 퇴출시키고 스스로 왕이 된 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명조에 신하를 칭하며 한성(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삼았다. 명나라 기간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밀접했다. 임진전쟁 중 중국은 조선을 도와 일본과 맞섰다. 요동전쟁 중 조선은 중국을 도와 여진과 싸웠다. 1636년 조선은 여진에 정복당한다. 중국보다 8년 빨랐다. 비록 조선은 여진족 청조의 번속이 됐지만 변발과 의복 개량은 없었다. 명조의 의례와 복식을 보존했다. 심지어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 연호를 수백년간 사용했다. 임진전쟁 300년 후 갑오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실현시켰다. '대한제국'은 중국을 내쫓았다. 비록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지만 일본의 한국 병탐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 선포로 일본은 정식으로 한반도를 병탐했다. 일본이 통제하는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최고 권력기구가 됐다. 일본은 한국 왕실을 일본 귀족으로 봉했다. 고종은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54운동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919년 3월 1일 일본 당국은 한반도의 모든 학교에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자 민간에서는 대규모 민족 반항 운동이 폭발했다. 류관순 등 청년학생은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이 독립선언은 빠르게 한반도 전역에 민족독립의 불길을 당겼다. 3월부터 6월까지 시위 1542차례, 참가인원 200만 명이 넘었다. 3개월간 지속된 31운동을 일본식민당국은 잔혹하게 진압했다. 사후 통계에 따르면 진압으로 7509명이 사망하고, 1만5961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6948명이 체포됐다.

31운동의 기운이 충만할 당시 중국으로 탈출한 조선독립운동인사들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승만을 총통에 옹립했다.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홍커우공원에서 폭탄 테러를 책동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39년 상하이가 일본에 넘어가자 임시정부는 수 차례 천도를 거듭 최종적으로 1940년9월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에 자리잡았다. 중국정부의 도움 아래 조선독립운동가들은 중국에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1941년12월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화민국정부는 동시에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5월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을 임시정부가 직접 관할 하도록 결정했다. 1932년부터 조선공산당원 김일성이 영도하는 유격대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유격활동을 펼쳤다. 김일성의 항일부대는 1937년 조선 북부 보천보를 점령했지만 1941년 이를 탈출해 소련으로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평가하건 승인해야 할 사실은 미국이 아시아를 구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미국이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하기 전 중국과 한국은 모두 일본 침략자를 향해 선전포고할 능력조차 없었다. 미국은 일본인을 중국과 한반도에서 물리쳤다. 1945년8월15일 일본의 35년 통치를 받은 한반도가 해방됐다. 1945년11월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도 이듬해 귀국했다.
폐허가 된 한반도는 한 서기관의 건의로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양국 군대가 나눠 한반도에 진주했다. 1947년9월 유엔총회는 결의 형식으로 한반도 재건 방안을 내놨다. 유엔 감독하에 한반도에서 총선을 거행해 통일 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의는 조선 북방 군사 통제자가 거절했다. 최종 선거는 남부에서만 진행됐다. 제헌의회는 헌법을 통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식 수립,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8년9월9일 북쪽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단, 유엔 195호 결의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한반도는 이로부터 남북 분열상태에 들어갔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은 제멋대로(悍然) 군대를 동원 남한을 침입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유엔은 세계의 이름으로 침략자에 반격할 것을 일치 통과시켰다. 조선인민군은 38선 이북으로 쫓겨갔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일대까지 밀렸다.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유엔이 거절한 베이징 정부가 돌연 참전, 유엔군을 습격한 것이다. 이로써 정의롭지 못하고 명예롭지 못한 전쟁은 3년간 지속된 끝에 1953년7월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한다. 이는 수많은 한국인, 중국인과 기타 각국의 수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뒤 모든 것이 종전으로 되돌아갔다. 조선은 여전히 조선이요, 한국은 여전히 한국이었다.

2.
정치발전 역정으로 말하면 현대 한국은 민주와 독재 통치가 반복적으로 교체됐다. 제1공화국은 이승만의 독재정치 아래에 있다가 1960년 붕괴, 민주적인 제2공화국이 수립됐지만 오래지 않아 군대에 의해 무너졌다. 그 후 제3공화국부터 제5공화국까지 한국은 모두 군부의 통치를 받았다. 1987년 후 제6공화국은 비로소 자유민주정부 수립이 시작됐다.
…(하략. 내용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까지)
3.
(박정희 사망 후 서울의 봄에서 광주민주화운동까지)
4.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서 87년 민주화 운동까지)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불요불굴의 한국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찬사를 금치 못함과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일찍이 이승만 시대 한국의 민중은 이미 대규모 공개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폭력적인 전제에 반대 민주 자유를 쟁취했다. 박정희로부터 전두환까지 한국은 한 독재자를 보내고 다른 독재자를 맞이했다. 반항의 물결은 가라앉지 않았다. 저조기가 있었고 고조기 또한 있었다. 하지만 굴복과 침묵은 없었다. 전두환시대 내내 한국 민중은 강권에 반항하며 현대 시민사회의 자아 구축 과정을 완성했다. 이는 한국이 최종적으로 전통 궁정 역사를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신앙의 힘과 강렬한 의지는 한국 민중이 최종적으로 폭력과 권력을 극복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선혈을 다시 뿌리지 않았다. 돌이 바람이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자유로운 의지는 전제자의 총검을 꺾었다. 대한민국은 완성 불가능한 역사의 기적을 완성했다. 같은 민족이지만 극도로 궁핍한 거지 국가 북조선과 대비해 한국 민중들이 추구하는 정치민주와 현대화의 결심과 의지력에 찬탄할 이유가 더욱 많다. 그들은 한 가지를 증명했다. 민주정신만이 전제의 칼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은 일찍이 말했다. 세계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 하나는 칼이요 하나는 정신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칼은 정신에 패한다. 인성(人性)이 반드시 수성(獸性)에 이기는 것과 같다.
2000년 한국 대통령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획득했다. 2007년 전 한국 외교장관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5
축구, 음악, 패션에서 영화까지 한국은 문화에서 선진적이고 강성해 수많은 중국인에게 질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국이 두렵건(恐韓)’ ‘한국이 좋건(哈韓)’ 이런 문화강성의 뿌리는 정치적 문명에 있다. 영화는 대표적인 민족 문화 경쟁력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영화 굴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다. 하늘 아래 공짜 점심은 없다. 이 발전과정에 한국민중은 피의 대가를 치렀다. 자유와 인권의 갈구, 전제 독재 통치의 전복, 자신과 후손의 해방을 위해 이 대가는 피할 수 없었다. 당시의 희생은 지금의 민주정치와 경제발달이라는 영광과 꿈으로 바뀌었다. 영화의 번영과 강성한 축구는 단지 한국이 현대문명의 정상궤도에 들어섰다는 결과에 불과하다.
32년 전 광주사건은 한국이 민주 실현과 화려한 변신의 도화선이었다. 24년 전 올림픽은 한국에 민주가 꽃피게 만들었다. 한국은 민주적 한국이 됐다. 한국은 부강에서 문명으로 달려갔다.

영화는 주류 문예작품이다. 정신 핵심의 건강과 건전은 불가결하다. 이는 중국 정부의 감독 체제에서는 완성 불가능한 임무다. 한국 영화는 영화 검열제도 폐지 이후 수작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에는 광주사건을 영웅의 거사로 그린 영화를 포함한다. ‘화려한 휴가’, ‘오래된 정원’, ‘그 해 여름’은 모두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영화 가운데 한국 청년들의 단순 용감 강렬함은 어떤 궁정 음모술수도 추악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그들이 정의롭고 당당하게 거리로 행진하며 국민을 학살한 군인을 반도라 꾸짖었지만 독재정부의 총칼 아래 ‘폭도’라는 모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현대 한국의 많은 전통 궁정 정변의 되풀이는 궁정음모에 대한 혐오와 수치감 역시 나날이 증대했다. 특별히 민간의 정치의식이 각성되면서 이미 시민사회가 형성됐다. 전통 궁정 음모는 부도덕하고 부정의 한 수작으로 치부됐다. 어떤 이는 민간사회가 현대 한국 정치의 주류 도덕을 재건했다고 말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전복성의 세례다. 그 근원을 추적해보면 동방유가문화의 질곡을 깊이 받은 한국 정치가 궁정 음모의 타락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서방 기독교 영향이 컸다. 복을 기원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불교와 도교의 몰락과 동시에 기독교는 평등이란 관념을 가르쳤다. 정치의 압박에 반대하는 일종의 더욱 기댈만한 신념과 제도적 기초를 제공했다. 기독교의 핵심은 양심의 자유다. 자유는 신체가 우선이 아니다. 지능도 아니다. 정신과 심리의 자유가 우선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자유는 사상의 자유, 언론 자유와 정치 자유를 위한 정신적인 원동력을 제공했다. 이러한 역량은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일본의 통치 시기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권위주의와 불교적인 피동성은 이미 완전히 기독교의 저투 정신으로 대체됐다. 기독교는 이로부터 빠르게 발전했다. 천주교도는 1910년 7만3500명에서 1945년 18만3600명으로 늘었고 개신교는 이 기간 10여 만 명으로 증가했다. 전쟁 후 한국은 기독교의 황금시기를 맞았다. 한국이 민주화 변신을 실현한 1980년대까지 천주교도는 이미 110만 명으로 늘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뒤를 이어 세계적으로 천주교도 숫자 4위의 국가가 됐다. 개신교도 역시 급증 900만 명에 이르러 전체 인구의 24%를 차지한다 즉 평균적으로 4명 중 1명이 개신교도인 셈이다. 종교문화적으로 말하면 한국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됐다.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종종 ‘제2의 이스라엘’이라고 자랑한다. 한국의 교회는 전체 5·18 운동 가운데 대체 불가능한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바로 5월18일 당일 학생들은 명동성당 앞에서 처음으로 침묵 시위를 펼쳤다. 전체 항쟁 기간 동안 천주교 성당은 방송국을 만들어 전국을 향해 계엄군의 잔혹한 학살행위를 폭로하고 시민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전파했다. 광주사건 진압 후에는 지속적으로 ‘광주 5월사건’을 보도했다. 교회 병원은 조직적으로 부상자를 치료했다. 당연히 교회 자체가 갖고 있는 자치색채와 민주문화를 홀시할 수 없다.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일찍이 “양심은 정치의 최고의 경지”라고 말했다. 이 점에서 말하면 한국 민주사는 양심을 찾아가는 역사였다. 최종적으로 양심이 폭력과 음모에 승리했다. 이는 정치적 승리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승리였다.
바로 그때 중국은 고질병이 여전했다. 그 최종 근원을 살피면 바로 양심의 상실에 있다. 국가 층면이건 사회층면이건 정치건 신앙이건 모두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재난에 가까운 연원을 갖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중국인은 모두 한국이 부유하고 발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 역사에 대해 일반 중국인들의 이해는 깊지 않다. 몽고와 여진 문화는 몽매하고 야만적이다.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수치심과 죄의식이 결핍되고 만족할 줄 모르며 폭력을 맹신한다. 몽고 문화와 여진 문화의 장기적인 영향을 받은 중국에 비해 같은 유가 문화권인 한국은 더욱 고전 중국과 비슷하다. 이 때문에 더욱 강렬한 수치감을 갖고 있으며 더욱 순수하다. 회피할 것인가 맞닥뜨릴 것인가를 선택할 때 이는 진정한 용감함을 감별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부터 광주사건까지 적지 않은 역사가 모두 중국 관방이 편안하게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국전쟁을 그르니 ‘태극기 휘날리며’는 좋은 사례다.

한국의 민주운동이 시작된 ‘광주사건’ 당시 중국은 마오쩌둥이 남긴 영향으로 경제와 문화 모두 낙후한 상태였다. 한국 군대가 자국의 시민을 학살할 당시 중국의 군대는 베트남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올림픽이 한국에 민주의 성화를 가져올 당시 중국의 민주는 비로소 거리에서 시작됐다. 오래지 않아 ‘광주사건’이 중국에서 발생했다. 규모는 더욱 컸다. 결과는 더욱 비참했다. 한국 올림픽 개최 20년 후 올림픽은 천재와 인재가 겹친 중국으로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하는 민주정신의 올림픽은 한바탕의 정치 세례로 한국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중국에서 ‘올림픽’은 단지 한바탕 사치와 부를 자랑하는 축제의 불꽃놀이에 불과했다. 운동회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마음껏 즐긴 후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단지 잡초 무성한 냐오차오 주경기장을 제외하고 모두… 지난 일을 되돌아 보면 ‘광주사건’은 영원한 하나의 맺음이었다. 한국은 답을 찾았다. 중국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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