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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 원칙 정해 공약 우선순위부터 매겨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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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04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21일 서울 마포의 개인 사무실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바람직한 운영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2007년 1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명단을 내놓았다. 대선 6일 뒤였다. 이 당선인은 인수위 부위원장에 원내대표를 지낸 4선 중진 김형오 의원을 발탁했다.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을 ‘첫 여성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했지만 부위원장엔 정무감각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2007년 당시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김 부위원장은 이후 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다. 올 4월 총선에선 지역구(부산 영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가 최근 펴낸 책 『술탄과 황제』는 한 달 만에 13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21일 서울 마포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을 찾았다. 김 전 의장(65)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란 맥아더 장군의 말을 인용하며 “정치인에게 은퇴란 없다. 서서히 사라질 뿐”이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인수위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5년 전 크리스마스 날 아침 이명박 당선인이 ‘통의동 사무실로 급히 와달라’고 하더라. 당선인은 ‘당신이 위원장을 맡아야 하는데 사정상 이경숙씨가 하기로 했으니 실제적으로 (인수위를) 주도해 달라’고 했다. 대선기간 이명박 후보의 공약과 정책을 총괄하는 일류국가비전위원장을 맡은 게 영향을 미쳤을 거다.”

-당시 인수위는 어땠나.
“솔직히 인수위가 뭘 하는지 개념 정립이 안 된 상태였다. 인수위의 한계나 역할에 대해 워크숍을 했어야 했는데…. 그땐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해서 전 정부의 협조를 받는데도 힘들었다. 전 정권이 추진해 온 걸 덜 의식하려 했다. 의욕 과잉도 있었다. 대통령 당선인은 인수위를 실무형으로 할지, 쇄신이나 탕평으로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인수위는 당선인의 첫 인사이고, 앞으로 국정을 어떻게 끌어갈지 의지를 표현하는 거다. 국민들은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시간에 쫓기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다만 위원장과 비서실장 인선은 가급적 빨리 하는 게 좋다. (인수위) 얼굴이기 때문이다. 인수위원장은 국무총리급 인물로 해야 한다. 가급적 그대로 행정부로 옮겨가는 게 좋다. 업무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정치로 귀결되게 마련이니 비서실장은 정치를 아는 사람이 좋다.”

-인수위가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이 돼야 한다는 건가.
“(인수위에서 정부 출범으로 갈 때) 사람을 자꾸 바꾸는 걸 최소화하면 좋겠다. 일 중심으로 하는 게 좋다.”

인수위원들 ‘한건주의’로 어그러져
-새 정부 각료 인사를 인수위가 추천했나.
“난 당시 인선에 관여 안 했다. 못 했단 말이 정확할 거다. 누가 했다는 게 신문에 알려졌잖나. 철학과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어떻게 뽑아야 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약했다. 논공행상으로도 비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이명박 당선인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 중심으로 한 거다. 이번엔 박근혜 당선인 스스로 말했듯 국민 100% 통합이란 시각에서 인사를 하는 게 옳다.”

-당시 당선인 사무실(통의동)과 인수위(삼청동)를 왜 별도로 설치했나.
“인수위보다는 당선인 사무실에서 내밀한 보고를 받을 수 있어서였을 거다. 처음엔 인수위에 힘이 실리는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르자 당선인 사무실 쪽으로 힘이 실렸다. 권력은 지근거리에서 나온다. 인수위원들이 당선인 사무실로 보고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원체제가 되면 곤란하다. 대통령 당선인은 인수위원장의 입장으로 임해야 한다. 당선인이 인수위에 자주 나와 회의를 주재하고 토론도 해야 한다.”

-‘영어 몰입교육’ 등의 미숙한 정책 발표도 있었지 않나.
“여과 과정이 필요한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표하기 시작했다. 총선이 바로 코앞이어서 서로 매스컴을 타려 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통제 사령탑을 해야 했는데 제대로 못 했다. 대통령이 뒤늦게 나보고 통제하라고 했는데 어렵더라. 인수위원들이 스스로 한 건 하겠다는 생각은 말아야 한다.”

-인수위가 역점을 두어야 할 일은 뭔가.
“두 달 남짓한 기간에 국민의 관심은 엄청나게 쏠리겠지만 여기서 뭔가 만들어내려 해선 안 된다. 2007년 인수위가 비판받은 게 ‘모두 다 할 수 있다’는 태도 때문이었다. 인수위가 할 일은 세 가지다. 먼저 인사 원칙을 정해야 한다. 기용할 사람이 어떤 캐릭터여야 하는지 정하는 거다. 또 정책 원칙을 정해야한다. 공약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거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공약 자체 평가를 통해 예산과 인적·물적 타임 스케줄을 마련해야 한다.

표를 얻으려 내놓긴 했는데 실현하기 곤란한 건 연구과제로 돌리겠다고 인수위 때 말하면 된다. 또 상대방 공약 중 받아들일 게 없는지 봐야 한다. 현 정부가 추진한 걸 새 정부가 수용할 것인지도 챙겨봐야 한다. 세 번째는 제도화의 원칙이다. 모든 게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 사람은 결점이 있고,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그 정책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시스템으로 움직이면 리스크가 덜하다. 뛰어난 개인이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다 자리를 떠나면 또 다른 정책이 나왔는데, 개인이 바뀌어도 추진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정립하는 게 좋다.”

-이명박 인수위는 부처를 통폐합하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만들었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부처를 다시 만들겠다고 하는데.
“당시 부처와 직결된 사람들 외에 (통폐합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통신부를 통폐합한 건 IT가 산업을 끌고 가니 모든 곳에 IT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산업자원부가 지식경제부가 됐는데 수장으로 굴뚝산업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데려다 놓은 게 문제였다. 부처를 부활시키더라도 과거로 돌아가는 부활이어선 안 된다. 정부 조직은 가변적으로 움직이는데 항상 미래를 봐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수개월 만에 촛불시위 등으로 고전했다. 문제가 뭐였을까.
“노무현 정부는 나토(NATO·NO Action Talk Only)였는데 이명박 정부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일했다. 일에 매몰돼 정치를 등한시했고 국민을 너무 급하게 끌고 가려 했다. 촛불시위 원인이 FTA이고, 그 핵심이 쇠고기 협상 아닌가. 그게 국민들에겐 서두르는 걸로 보인 거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잤는데 그 직전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면서 야당에 공격 빌미를 줬다.”

호남 출신 앉힌다는 프레임은 금물
-박근혜계 인사들이 기득권 포기 선언을 하는 건 어떻게 보나.
“당선인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그런 선언을 한 건 잘한 거다. 친박이냐 아니냐에 따라 1등 공신, 2등 공신으로 분류되면 또 하나의 장애 요소가 될 거다. 좀 더 확산이 됐으면 좋겠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조언한다면.
“당선인은 전국을 많이 다녔으면 좋겠다.(지지율이 낮았던) 광주를 제일 먼저 찾아가면 좋겠다. 100% 대한민국 통합을 해야하지 않나. 농어민, 중소기업인을 만나 애로사항도 듣고, 산간 벽지를 찾아가는 것도 좋다. 온 국민의 어머니 역할을 하면 지역계층세대 간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본다. 또 공무원을 믿으라고 강조하고 싶다. 2007년엔 정권을 교체했기 때문에 공무원도 정권의 하수인으로 보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공무원은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집단이다. 공무원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도록 잠재력을 끄집어 내야 한다. 또 청와대는 인사권을 갖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 이유 중 하나가 청와대인사수석실을 둔 거다. 이명박 정부도 (청와대) 비서실장 밑에 인사기획관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는데 관철이 안 됐다.청와대가 공무원 인사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청와대만 쳐다보게 된다. 인사권을 장·차관에게 넘겨줘야 장악력이 생기고, 친박이냐비박이냐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또 인수위·새 정부 인사에선 도덕성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봐야 한다. 변화를 이끌어 갈 세력은 도덕성이 중요하다. 호남 출신을 갖다 놓겠다는 프레임에 사람을 집어넣진 말아야 한다. 3만 달러 시대로 가야 하는데 그런 건 2만 달러 시대 프레임이다. 억지로 신발에 발을 맞추는 식으로 하지 말자는 거다. 시대 변화를 이끌어 갈 적임자라면 호남이든 누구든 구애받지 말고 써야 한다.”

-이번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었는데.
“시대정신은 변화다. 문재인 후보는 변화란 키워드를 제대로 못 살렸다. 진보가 변화, 보수는 안정을 주장한다는 등식도 이번엔 깨졌다. 문재인 측은 진보가 아니라 진부한 세력으로 국민들에게 비쳤다. 박근혜 당선인이 문후보에게 전화한 건 아주 좋은 일이다. ‘이제 꿈을 접었다’는 문재인의 말은 멋지다. 그런데서 오히려 문재인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이 마지막 진영 싸움이 되길 바란다. 영하 10도의 날씨 속에 국민의 75.8%가 달려들어 진영 논리로 대결했다. 이젠 밖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 내가 술탄과 황제라는 책을 쓴 것도 우리 안에 갇혀 있지 말자는 거다. 반도에서 탈피해 글로벌 시민으로서 주체의식을 갖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새 정치’가 대선 화두였는데 앞으로 국회는 어때야 하나.
“국정감사를 10월 달에 몰아치지 말고 9월 이전에 끝내야 한다. 요새 국감에선 튀기위해 뱀·화염병을 들고 나온다. 아무리 밤새워 연구해도 문방위 같은 곳에서 치고받으면 그걸로 덮인다. 또 상시 국회도 중요하다. 국회가 오늘 열릴지를 국회의장도 모르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원내대표들이 수틀리면 안 연다 하니 대한민국 국회가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도 욕을 먹는다. 이것만 고쳐도 국회를 보는 국민의 눈이 달라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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