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내년 예산안을 누더기로 만들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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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치열한 대선이 끝났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발밑의 현실을 살펴야 할 때다. 국회가 어제부터 예산결산심사위원회를 가동했다. 이미 예산안 법정 처리 기한(12월 2일)을 훌쩍 넘긴 만큼, 아무리 신속하게 예산 심의를 해도 연말까지 본회의 통과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빠듯한 일정에 밀려 졸속 심의라도 피할 수 있다면 다행일 정도다. 여기에다 올 경제성장률이 2%대에 그치고 내년에도 회복 기미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예산안 통과가 늦어진다면 재정 조기 집행을 통한 경기 부양은 물 건너가게 된다.

 여야는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서 1조원 정도 감액하기로 의견을 모은 모양이다. 문제는 여야가 대선 공약 실천을 명분으로 내년 예산의 대폭 증액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3조~7조원의 막대한 규모다. 박근혜 당선인은 유세 과정에서 0~5세 무상보육과 경기활성화를 위해 6조원을 내년 예산안과 기금운용계획에 추가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새누리당은 국채 발행까지 각오하며 이를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이다. 민주통합당 역시 “예산 감액 규모를 늘리되 무상보육과 반값 등록금,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적어도 7조원 정도의 증액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년 예산안에는 이미 경기확장적 성격이 충분히 반영돼 있다. 대선 공약을 의식해 무리하게 증액시킬 경우 예산안은 누더기가 되고 밀도 있는 심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내년 예산안은 수정을 최소화한 채 원안대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 일단 대선 때 쏟아진 복지 공약들을 차분하게 정리해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무상보육이나 무상교육 등을 한꺼번에 실시할 경우 무리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꼭 필요한 복지 예산이라면 재정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2014년 예산안 때 충분히 반영해야 할 것이다. 설사 내년 경기가 예상 외로 침체하더라도 추가경정예산 편성으로 대처하는 게 정석이다. 새 정부 첫해부터 재정적자가 급속히 팽창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5년 주기로 대선 승리에 들떠 무리하게 예산안을 뜯어고치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