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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의 일생|40년을 두문불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조선왕가의 마지막 대비마마인 윤비가 낙선재에서 외로이 숨졌다. 구한말의 풍운과 6·25동란― 윤비는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낙조 어린 오직 왕가의 마지막 위신을 지키기 위해 고독과 싸워왔다.
향년 73세. 윤비는 왕비가 된지 20년 만에 홀몸이 되고 홀몸이 된지 20년 만에 왕가의 마지막 왕비로 대한민국의 시민이 되었으며 시민이 된지 꼭 20년 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윤비가 14살 때 순종의 왕후가 된 것도 병오년이니 만60년 간을 사양의 왕가를 지키기 위해 모지름을 쓴 셈이다.
그는 성 상궁·박 상궁·김 상궁 세 명의 상궁만을 곁에 두고 창덕궁 한곁 낙선재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끊다시피 하고 살아왔었다. 주위에서 『심심하니 새라도 길러보시라』 고 새장 속에 든 새를 보내오면 『얼마나 저 푸른 창공이 그립겠느냐』고 자신의 홀로된 몸에 한숨을 지으며 새장 문을 열고 새를 날려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윤비 자신은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체념한 채 외부와의 접촉을 극력 싫어했다. 유일한 낙은 낙엽진 창덕궁 안을 조용히 상궁과 더불어 거니는 것. 윤비는 한문은 물론 일본어, 영어 그리고 「피아노」까지 할 줄 알면서도 마지막 왕가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소외당한 고독을 반겨 즐긴 것이다.
윤비는 일제 때 후작이었던 윤택영씨의 장녀로 1894년 음력8월20일에 태어났다. 아명은 대지월. 순종의 동궁비가 운명하자 14살의 어린 나이로 간택에 뽑혀 계비로 입궁했다.
순종이 승하하기까지 20년 동안 순종과의 금슬을 김 상궁은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였다』고 말하고있다.
시골에서 진상해온 새로운 곡식이나 과일이 있으면 꼭 순종이 먼저 들었는가를 확인한 후에야 자신이 들었다고 한다.
순종이 돌아가고 난 뒤 『채색단청된 집에서는 살 수 없다』고 옮겨간 곳이 바로 운명한 낙선재-낙선재는 40년 동안 6·25때만을 빼놓고 윤비의 한숨과 외로움이 깃들인 곳이다.
홀로된 후 윤비는 불교에 귀의, 윤대지월이란 법명을 받고 괴롭고 의로운 나날을 좌선으로 잊었다.
6·25동란 때 서울에 밀려든 인민군은 6월28일 윤비를 『지금까지 편히 살았구나』 하면서 낙선재에서 쫓아냈다. 집까지 쫓겨난 윤비는 운현궁에 잠시 의탁했다가 1·4후퇴 때 서울지구 미군사령관이었던 「쳄맨」 장군의 알선으로 비행기편 좌석 두 자리를 겨우 얻어 박 상궁과 더불어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 집을 네 군데나 옮기면서도 윤비는 불평한마디 없었다고 한다. 이때가 윤비에게는 가장 고생스러웠던 때였으며 그 후 가장 기뻤을 때는 이복 시동생이며 왕자인 이은씨 부처가 귀국했을 때였다고….
그러나 이은씨 부처가 귀국한 후에도 윤비의 생활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해가 뜰 무렵이면 잠을 깨서 저녁 아홉시쯤 잠들 때까지 하루동안 방안에 앉아만 있었다고 상궁들은 말했다.
윤비의 식구는 3명의 상궁과 5명의 여직원 등 모두 9명. 순종과의 몸에서 자손하나 없는 고독 속에서 정부가 주는 한달 생활비 18만원으로 살아왔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으면서도 세상물정을 알기에 열심―네 가지 신문을 보며 「텔리비젼」까지도 즐기면서 최후의 대비마마는 왕가의 위엄과 고독, 그리고 풍운 속에 소리 없이 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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