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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을 업어 기른 조직현 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역시 전하라고 불러야죠…』 머뭇머뭇 대던 조직현 노인은 비로소 힘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부르든 역시 영친왕 전하입니다.
지금도 이 늙은 등에는 전하의 체온이 느껴집니다』라고 되뇌었다.
벌써 까마득한 60년전의 일…영친왕 이은씨가 6살되던 해다.
조 노인은 친위대 (시위대) 장교의 한사람으로서 영친왕 이은씨를 업어 기를 때를 회상하며 엄숙히 옷깃을 여몄다. 올해 85세가 된 조 노인- 온갖 영고성쇠와 파란만장을 겪은 후 지금은 경기도 이천군 백사면 송말리 신혁균씨 집 사랑채에서 마을 어린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여생을 달래고 있는데 『한번만 더 전하를 뵈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눈물마저 글썽대는 것이었다.
조 노인이 시위대 (친위대)의 병졸이 된 것은 19살 때였다. 무인의 집안에 태어난 조 노인은 무관 학교를 지망했으나 낙방, 그래서 친위대 병졸로 들어갔다.
친위대 1대대에 배치된 그는 서소문에 주둔하면서 풍운이 사납던 그 시절의 덕수궁을 지켰다. 이것이 영친왕을 알게된 동기. 한성 중학을 나와 남달리 영특했던 조 노인은 병졸 중에서도 글씨가 좋아 곧 시위 1대대 박승환 참령의 눈에 들었다. 서역이 된 그는 매일같이 임금이 보시는 어람생기를 꾸며 바치는 일을 보았다.
이때부터 궁궐 출입이 잦았다. 어느날 중화전에 들렀을 때다. 고종 엄귀비 등 척신현관이 많이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6살이던 영친왕은 조 노인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더니 『나한번 업어달라』고 했다. 조 노인은 머리를 조아릴 뿐.
이때 엄귀비는 『한번 업어 주라』는 엄명이 내렸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때부터 영친왕의 말동무가 되고 나들이 때는 영친왕을 업고 다녔다.
임금께서는 옥색바지 저고리와 버선에 이른기까지 궁복 한벌을 하사했다.
『그처럼 글씨를 잘 쓰시고 그처럼 영특 하셨던 영친왕께서…』하며 조 노인은 이은씨를 자랑하기에 바빴다.
조 노인의 등에 업혔던 나 어린 영친왕은 『어디서 먹지』 『집은 어디야』 『어디서 사느냐』는 등 무척 조 노인을 따르고 측은히 생각해 주었다 한다.
조 노인은 이은씨에게 세상 물정도 이야기하고 집 없는 서민들은 사글세방을 빌어 살기도 한다는 등 자세히 이야기해 주면 큰 관심을 쏟으며 들었다는 것이다.
어느날 엄귀비는 조 노인을 불러놓고 『내가 집을 한채 마련했으니 들도록 하라』고 분부하더라는 것. 알고 보니 영친왕이 집을 주자고 하도 졸라대서 집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대평동에 있는 17간짜리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영친왕이 차츰 나이들자 수학원 공부 때문에 만날 기회가 뜸했어도 영친왕이 불모로 잡혀 이등박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곁에서 모셨다. 이때 영친왕의 나이는 11살. 조 노인은 24살 때였으며 조 노인은 참위였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간 뒤는 영영 만날 길이 없었으나 고종의 인산 때 환국한 영친왕을 한번 뵈었다. 그때 영친왕은 조 노인을 보고 『너도 많이 늙었구나』하면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한다.
조 노인은 그 뒤의 병으로, 독립군으로 멀리 만주 간도 등을 돌아다니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고향인 용인군 용인면 유방리에 있던 부인 이달희씨는 해방전 조 노인이 63살 때 세상을 떠났고 맏아들 재영 (35)씨는 6·25때 납북, 딸 재창 (46)씨는 남편과 사별, 송말리에서 딸 하나를 데리고 외롭게 살고 있다. 작년까지 용인에 있다 얼마전 신씨 집 사랑채 서당에서 훈장으로 식객 신세가 됐다. 한편 조 노인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이은씨 측근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으나 그분이 어디 살고 계신지는 몰랐다』고 말하며 『사실이 확인되면 방자 여사나 이구씨가 그분을 만나 볼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천=본사 김경욱·김정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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