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서전 낸 ‘출판 거인’ 박맹호 “책은 인간의 DNA”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박맹호 회장.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그의 휑한 표정에는 허점이 있어 보이지만, 캐 갈수록 속 깊은 사람, 세속과 다투지 않고 그 게임에서 이긴 사람”이라 했다. [사진 민음사]

“나는 책을 통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책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됐다.”(22쪽)

 책 만드는 일에 반 백년을 바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책이 되어 나왔다. 국내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인 민음사 박맹호(79) 회장의 자서전 『책』이다. 1966년 봄, 10평 남짓한 옥탑방 사무실에서 ‘민음사(民音社·백성의 소리)’란 이름으로 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46년 만의 일이다.

 박 회장은 처음엔 사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까짓 책들 파지로 갖다 팔면 몇푼이나 나오겠냐”는 힐난을 듣기도 했다. 일은 녹록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이데아 총서’ ‘대우 학술 총서’ ‘세계문학전집’ 등 일련의 시리즈를 비롯한 5000여 종의 단행본이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한국 출판계의 성장과 부침을 함께 겪으며 민음사는 문학·인문·아동·과학 등을 아우르는 대형 출판그룹으로 거듭났다.

 11일 만난 박 회장은 “최근 출판 위기론이 확산되면서 제 이야기가 독자들과 출판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자서전을 쓰게 됐다”며 “책은 인간의 DNA다. 절대로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출판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읽을 만한 우리 책이 없었다. 일서(日書)뿐이었고, 해적판이 대부분이었다. 디자인이나 종이, 판형도 다양하지 못했다. 세련된 책에 대한 한없는 갈증이 있었다. 한국 책을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 반평생 출판에 몸담으며 기억에 남는 일화는.

 “민음사에서 출판한 첫 책이 『요가』였다. 당시 1만5000여 권이 팔리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그때 ‘출판업이 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책인 유주현 작가의 『장미부인』이 완전히 실패하고 빚을 많이 졌다. 아내가 빚을 갚기 위해 약국을 운영하다 쓰러졌는데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박 회장은 국내 신진작가를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았다. 고은·김현과 함께 ‘오늘의 시인 총서’를 펴내며 김수영·김춘수 등을 조명했다.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선 이문열이라는 보석을 발견했다.

 “예나 지금이나 기성의 공간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서운 신예들이 칼을 갈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다. 출판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이 이런 작가들에게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질서를 세우도록 돕는 것이었다.”

 - 자서전에 직접 쓴 단편소설 ‘자유풍속’(1955)을 공개했는데.

 “제1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작품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당선에서 제외됐다. 문학청년이었지만 여러 고전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은 천재가 쓰는 것이구나’ 절망했다. 스스로 능력을 간파하고 과감하게 소설을 포기한 것이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다. 쓰는 것보다 좋은 작품을 발굴해 세상과 만나게 하는 희열이 더 크다.”

 - 은퇴 전에 마지막 꿈이 있다면.

 “‘세계문학전집’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98년 시리즈를 처음 시작할 때는 100권 정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306권까지 나왔고, 지금 욕심으로는 1000권까지 하고 싶다. 일을 쉬는 것은 ‘고문’이다. 세계문학을 한국에서 모두 수용하고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