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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8기 정치국위원 열전 ④] ‘시인’ 마카이(馬凱)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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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시인(高官詩人).’ 마카이(馬凱·66)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다. 태자당 경제관료 마카이의 과거는 순탄치 않았다. 5년 전 17차 당대회 직전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로부터 정치국위원 진입이 안됐음을 통보받고는 상심에 개막식과 폐막식만 참석했을 뿐 두문불출했던 그다. 5년 후 6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난 5일 시진핑(習近平) 총서기가 중국에 거주중인 외국인 전문가를 초청해 중국 신지도부의 시정방침을 밝히는 자리에서 마카이는 시진핑의 바로 오른쪽에 앉았다. 그의 위상이 5년 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웅변하는 배치였다. 시진핑 시대 경제는 리커창(李克强) 차기 총리가 이끈다. 마카이는 리커창 경제팀에서 시진핑의 복심(腹心)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부터 그의 행보가 주목을 끄는 이유다.

◇노래하는 경제관료
마카이는 시인이다. 이름부터 당시(唐詩)에서 나왔다. 당(唐)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의 시구 “길가에서 개선가를 들으며 말 타고 돌아오니, 왕을 보며 말 달리니 꽃 향기 나부낀다(聞道凱旋乘騎入, 看君走馬見芳菲)”에서다. 군대가 개선하는 모습을 그린 시다. 마카이의 아버지가 전선에서 승리하자 문화적 소양이 있던 부모가 아이에게 ‘마카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원문: 송지문, ‘군중인일등고증방명부(軍中人日登高贈房明府), 幽郊昨夜陰風斷, 頓覺朝來陽吹暖. 涇水橋南柳欲黃, 杜陵城北花應滿. 長安昨夜寄春衣, 短?登?一望歸. 聞道凱旋乘騎入, 看君走馬見芳菲. 『전당시(全唐詩)』 51권)
마카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자작시를 읊었다. 상하이에 엑스포에서는 ‘화려한 등과 밝은 달이 서로 비추고, 시원한 바람과 편안한 노래가 얽혀 흐르네(華燈明月交輝, 輕風柔曲??), 티베트 라싸를 잇는 칭짱철도 개통식에서는 ‘천 년의 소망이 이제 이뤄졌다. 하늘 길에 올라, 강철 용을 타노라(祈盼千年今願了, 天路上, 駕鋼龍)’, 유인 우주선 발사 성공에는 ‘한 세대의 소원, 십 년의 검, 한 시대의 보상(世代願, 十年劍, 一朝酬)’이라고 읊었다. 1998년 대홍수에는 ‘구팔항홍(九八抗洪)’ 10수를 지어 천재(天災)에 맞서 싸우는 인민의 분투를 찬양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시작(詩作)을 단지 습작(習作)이라고 말한다. ‘뜻을 말하고, 심정을 말하니, 스스로 유쾌하고, 스스로 즐거울 뿐(言志, 言情, 自娛, 自樂也)’이라고 말한다. 또한 시작에 대해 “시인은 먼저 진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詩人首先應該是一個?正的人)”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인물이다.
마카이는 효자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애처가다. 부친의 20주기 때에도 그는 시를 지었다. “바람은 스산하고, 구름은 자욱한데, 사당에 들어가는 걸음이 휘청이네. 영정을 문득 보니 마음이 부서지고, 다시 보니 눈물이 천 길이로다(風瑟瑟,雲茫茫,未進靈堂步??。一見遺像心欲碎,再看人已淚千行)” 떠나간 부친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한 자 한 자에 절절히 담았다.
마카이는 30년전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부인 위안중수(袁忠秀)를 위해 수 많은 시를 지었다. “보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음이 꿈 속에서 다시 잠이 든 듯하다(欲見還怯, 疑在夢中睡)”라는 연애편지의 한 구절부터, 신혼 1주년 기념일에는 “지난 해부터 오늘 밤까지 겨울 내내 헤아렸네, 작은 다락방에 봄이 넘치니 등불이 붉구나(去歲今宵數九冬, 小樓春溢燭燈紅)”라는 시를 지었다.

◇태자당 마카이
마카이는 태자당이다. 그의 공식 이력을 보노라면 의문점이 한 가지 떠오른다. 그는 1965년 8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한 달 뒤인 1965년 9월 베이징시 제4중학 교직원으로 취직했다. 고등중학을 졸업한 19살에 입당했다. 당시는 문혁 발발 이전으로 대입 경쟁이 매우 치열할 때였다. 그렇다면 여름방학이자 대입 시즌이었던 8월에 입당한 사실에 의구심이 든다. 게다가 베이징 제4중학은 명문중의 명문이다. 어떻게 고등중학 갓 졸업생이 모교 교사가 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결과를 놓고 추측해보면 마카이가 대입에 낙방해 지망했던 대학에 입학할 수 없게 되자 제4중학이 마카이의 배경을 고려해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를 입당시킨 뒤 학교 교사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제4중학은 고급 간부 자제들 비율이 중국에서 가장 높은 학교다. 예를 들어 천윈(陳雲)의 아들 천위안(陳元), 보이보(薄一波)의 아들 보시라이(薄熙來) 등이 모두 베이징 제4중학 출신이다.
1953년 마카이는 시안(西安)에서 군간부 자제를 수용한 서북보육소학(지금의 육영(育英)소학)에 입학한 뒤 1955년 부모와 함께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1959년 제4중학에 입학했다. 문혁기에는 제4중학도 수업이 정지됐다. 혁명의 물결이 전 중국을 휩쓸었다. 마카이도 학교에서 교편을 놓고 4년간 혁명에 휩쓸렸다. 1970년 5·7간부학교에서 3년간 노동에 종사했다. 이로서 제4중학 교사생활을 끝냈다.

◇경제연구로 전향, 정계 진출
1973년 마카이는 5·7간부학교에서 나와 베이징 시청(西城)구 당교로 배치받았다.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변신했다. 마카이는 간부학교와 당교에서 보낸 9년을 충분한 사고와 학습의 기회를 삼았다. “문화대혁명에 직면해 점차 의문이 들었다. 우리 제4중학 친구들은 『시대·사명·준비』를 읽으며 연구의 대강을 결정했다.”
당시 마카이는 정치경제학에 빠져들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주요 저작을 독파했다. 1년 여 동안 저녁 식사 후 한 두 시간씩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나갔다. 이 시기 그의 철학과 정치경제학 분야의 독서와 학습은 이후 그의 연구와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79년 마카이는 중국인민대학 경제학부의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쉬허(徐禾), 웨이싱화(衛興花), 우수칭(吳樹靑) 등을 은사로 모셨다. 웨이싱화 교수는 마카이에 대해 “마카이의 부모는 고급 간부였지만 마카이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매우 착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도 학문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지했다”고 회고한다. 웨이 교수는 마카이가 학계에 남지 않고 정계에 나선 것을 매우 유감으로 여긴다.
마카이의 석사 논문 ‘계획가격형성의 요소 분석(計劃價格形成的因素分析)’은 『중국사회과학』 영문 저널에 게재됐다. 마카이는 1982년 중국인민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석사학위를 가진 고급간부 자제가 청장년 간부로 발탁되는 것은 당시의 추세였다. 마카이는 정계를 하늘을 나는 말과 같이 질주했다. 1983년 이후 마카이는 베이징시 시청(西城)구 계획위원회, 베이징시 체제개혁위원회, 베이징시 물가국, 국가물가국,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국가계획위원회를 거치며 승진 행진을 이어갔다.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을 거쳐 국무위원으로 승진
1986년 마카이가 베이징시 물가국 간부로 취임하면서 물가 관리 업무의 최전선에서의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물가국에서 근무한 고참 동지들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정부가 많은 상품의 가격규제를 완화하는 방식으로 가격개혁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점차 모순이 뒤엉키면서 물가 업무의 제1선에 있던 마카이는 하루하루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과 교섭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됐다. 불과 2년 반의 기간이었지만 물가관리 업무의 단맛과 쓴맛을 다 맛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989년 마카이는 국무원으로 이동발령을 받았다. 그 뒤 1998년 국무원 부비서장이 됐다. 그는 “한 부문의 업무에 참가하는 것에서부터 국무원 최고지도부의 활동에 협력하는 것까지 계획·금융·농업·임업·수리·국토자원·도시건설·환경보호 등의 많은 분야에 관계했다. 시야가 끊임없이 넓어졌다”고 회상한다.
국무원 판공청에서 근무할 당시, 마카이는 총리급 지도자를 수행해 전국 각지를 시찰·조사·연구했다. 정부가 운용한 경제의 일련의 조치에 참여해 국가 발전과 개혁 과정을 잘 익혔다. 국민경제의 각 산업 각 부문의 발전과 개혁의 상황을 이해하기 충분했다.
2003년 봄까지 계획위원회 계통과 체제 개혁부문에서 장기간 활동했다. 또 10여 년 간 지방에서의 근무 경험과 중앙에서 10여 년간 단련한 마카이는 이후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이하 발개위) 주임으로 임명됐다.
같은 해 실시된 국무원기구개혁방안에서 발개위의 주요 직책은 국민경제 사회발전전략, 장기계획, 연간계획, 산업정책과 가격정책의 제정과 실시, 국민경제운용의 관측과 조정, 경제 총량균형의 조절, 중대한 경제구조의 최적화, 국가중대건설프로젝트의 예정 배분, 경제체제개혁의 지도와 추진 등의 업무를 맡았다. 국무원의 위탁을 받아 전인대에서 국민경제 사회발전계획 보고도 담당했다. 발전과 개혁에서는 중국경제에 선행하는 두 개의 명제가 포함하는 명칭에서 상상할 수 있듯이 마카이가 담당한 직책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발개위 주임 5년 동안 마카이는 주로 원자바오와 협력해 거시조정의 추진과 중요계획의 제정을 담당했다. 가격전문가 마카이는 물가 조정과 인플레이션 감시와 관리에서도 중책을 맡았다. 또 2007년 말부터 2008년 봄 양회 개최까지의 시기에 중국의 소비자 물가는 정부 조정과 관여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올랐다. 특히 대중 생활에 직접 관계 있는 식료품 가격이 크게 올랐다. 정부가 상정한 4.8% 라인에 육박했다.
마카이는 물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물가는 잡았지만 그 자신이 유탄을 맞았다. 2008년 3월 전인대 국무위원 선출에서 당의 관련 부문에서 노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표에 달하는 반대표를 받았다. 최하위였다.

◇5년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마카이는 1946년 6월 생이다. 68세 은퇴 67세 잔류하는 ‘칠상팔하’라는 철의 불문률에는 1년의 여유가 있다. 예상을 뒤엎고 지난 18대에서 정치국위원에 오른 이유다. 하지만 2008년 3월 전인대국무원 인선에 대한 표결에서 그는 최저 득표를 기록했다. 마카이 바로 앞은 류옌둥(劉延東)이었다. 그녀는 정치국위원이었지만 35표의 반대표와 16표의 기권표가 나오자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 당시 베이징 정가에서는 마카이에게 미래가 없다는 전망이 많았다. 원자바오 경제팀에 속했던만큼 원자바오 총리 퇴임과 함께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졌다. 전망은 틀렸다. 그는 금융분야 부총리로 향후 5년간 중국 경제의 지속발전을 위한 중책을 맡게 됐다.
문제의 2003년 3월 제10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 회의에서 국무원기구개혁방안이 통과됐다. 이 방안에 따라 국가발전계획위원회가 발개위로 개조됐다. 마카이는 새로운 기구의 주임으로 임명됐다. 언론매체들은 그와 재정부장 진런칭(金人慶), 중국인민은행 저우샤오촨(周小川) 행장, 뤼푸위안(呂福源) 전상무부장과 함께 원자바오 초대 내각의 4대 경제관료로 손꼽았다.
5년 후 11차 전인대 1차 회의에서 마카이는 한 층 더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국무위원 겸 국무원비서장이 됐다. 한 달 후 국가행정학원 원장 직도 겸임하게 됐다.
사실 마카이는 주룽지(朱鎔基)가 발탁했다. 하지만 원자바오로 전향하는데 방해하지 않았다. 1998년 주룽지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이던 마카이를 국무원으로 불러 국무원부비서장에 임명했다. 2000년에는 장관급으로 승진시켰다.
16차 당대회 이후 신설된 발개위에 마카이가 수장을 맡았다. 발개위의 관리 범위는 광범했다. ‘제2국무원’으로 불릴 정도였다. 원자바오가 마카이에게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 “정령(政令)이 중난하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마카이는 국가에너지영도소조판공실의 주임도 겸임했다. 그는 부지불시간 원자바오를 제약하는 위치에 있게 됐다.
마카이는 곧 이 상황을 인식했다. 원자바오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그의 양해를 얻어냈다. 17차 당대회 이후 원자바오는 마카이를 국무위원, 국무원당조성원 겸 국무원 비서장, 국가행정학원 원장으로 조정했다. 발개위는 장핑(張平)이 맡았다. 마카이의 기존 직무 중에서는 국무원서부지구개발영도소조판공실 주임만 남겼다.
일부 논평가는 이 조치를 마카이에 대한 강등 조치라고 평했다. 반대로 이는 원자바오가 마카이를 신임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핸디캡은 불안한 건강
2012년 초 몇 달 간, 심지어 양회 기간 동안에도 관방매체에 마카이의 동정이 실리지 않았다. 각종 유언비어가 퍼져나갔다. 류즈쥔(劉志軍) 철도부장 낙마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콩 언론은 마카이의 중병설을 퍼뜨렸다. 수술 후 휴양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3월16일 출판된 중앙이론지 『구시(求是)』에 마카이의 ‘충실히 헌법과 법률을 집행하고 법치정부를 빠르게 건설하자’는 글이 실렸다. 순서도 시진핑의 ‘관건은 실천이다’ 바로 뒤였다. 마카이가 류즈쥔 사건과 무관하다는 표시였다. 이 문장은 1월 24일 마카이가 중국특색사회주의법률체계 형성을 다룬 좌담회에서 한 강연을 정리한 것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마카이는 위장병이 있었다. 이번에 위암으로 전이됐다는 소식이었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다. 마카이 정도의 위치에 있는 국가 영도인의 건강은 국가기밀이다. 양회에 불참했다는 사실이 불러온 보도다.
17차 당대회 이전 마카이는 정치국 위원과 부총리 승진의 꿈을 품고 있었다. 말이 말굽을 잃은 ‘마실전제(馬失前蹄)’ 상황이었다. 홍콩 ‘명보’의 보도에 따르면 2007년 9월 초 APEC회담 참석차 호주로 향하던 후진타오는 전용기에서 동행한 마카이를 불렀다. 차기 정치국 위원 후보 리스트에 마카이가 들어있지 않음을 통보했다. 마카이는 실망했다. 베이징으로 돌아 온 뒤 요양에 들어갔다. 17차 당대회에서도 개막식과 폐막식을 제외하고 보이지 않았다.
5년 후 18차 당대회 이후 그는 화려하게 복귀했다. 지난 5일 시진핑이 중국에 거주중인 외국인 전문가를 초청해 중국 신지도부의 시정방침을 밝히는 자리에서다. 마카이는 시진핑의 바로 오른쪽에 앉았다. 그의 위상이 5년 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웅변하는 배치다. 마카이는 인플레이션 잡는 전사이자, 거시경제 전략가다. 시진핑 10년의 성패는 경제에 달렸다. 리커창에게 전권을 맡기돼,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바로 마카이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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