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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재분열|을사년 정국의 분기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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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65년은 파란많은 한해였다. [한·일회담]이란 해묵은 쟁점을 에워싼 정부와 야당, 그리고 학생들의 대결은 [데모]와 강압의 극한적인 말씨름 끝에 힘에 의한 수학적 승패로 가름졌고 국회, 행정부, 여당마저 어느 사이엔가 정치권외에 한거하기 버릇됐다. 그리고 단일야당이란 오랜 염원을 깊어진 야당은 또 통합대회가 바로 분당의 새 출발이 된 숙명적인 파벌암투를 끝내 청산못해 신당 논의가 활발하고 학원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은 채 있다. 여기 을사정국을 특징지은 사건들을 추려 그 전환과정을 더듬어본다.
야당의 숙원이던 통합대회가 열리던 6월14일 윤보선씨댁은 우수로 젖었다. "대세는 기울어 졌습니다. 이제와서 통합을 깰 수는 없고 지더라도 일단 따를수 밖에 없게 되있습니다" 아침 7시 윤씨에게 패배를 예고하는 윤제술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윤씨는 이때 처음으로 상식이라고 믿었던 윤보선당수선이 반윤전열에 의해 허물어질 위기에 부딪쳤음을 느꼈다. 바로 이때 찾아든 것이 정풍운동파의 대표 김영삼의원-그는 "선생님을 당대표로 밀기로 했습니다"라고 윤씨에게 보고했다. 얘기를 끝내고 나올 때 마루까지 따라나온 윤제술씨는 "조금전에 우리는 패할 것을 깨닫고 체념하고 있었소. 김의원이 결심했다면 승산은 충분하오" 새로운 용기에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김의원의 머리는 어지러웠다. 김의원은 이날 새벽 "윤씨가 당수가 안될 때는 당은 깨어질 것"이라는 김룡성·이은태씨등 일부의 판단에 따라 정풍운동파는 반윤전열에 가담키로 했던 방침을 돌변했던 것인데 윤제술씨에게서 "표결에 복종키로 했었다"는 말을 듣자 협박에 속았음을 깨닫고 반윤전열로 다시 돌아섰다. 이리하여 통합대회의 표결결과는 민주계주류 4개사단 유진산사단 자민계 일부의 반윤연합군단이 민중당의 윤씨계와 민주계의 정일형사단 및 자민계안의 서민호씨계로 짜여진 윤보선군단을 눌러 윤보선씨 아닌 박순천씨에게 당표직을 넘겼다.
민중당의 이같은 선택은 대열을 둘로 쪼개고 야당단일화의 꿈을 무산시키는 풍운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대회다음날 "선명한 야당을 위한 투쟁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윤씨의 선언은 윤씨계 전열의 침울을 다시 전의로 일깨웠다. 윤보선군단은 박순천체제에 바로 도전했고 2년에 걸쳤던 파동속에 쌓인 불신과 적의까지 폭발된 다툼은 거센 풍랑이 되어 민중당을 뒤흔들었다.
박·윤양씨의 상반된 시국관은 한·일협정비준저지의 방법을 둘러싼 강·온의 대립으로 틈을 넓히면서 절망적인 파탄을 향해 치달았다. 박순천체제는 윤보선씨가 설정했던 극한궤도를 선회하려했고 윤씨계는 "불투명한 온건노선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맞서나와 의원직 사퇴에서 당 해체로 강경의 심도를 보태갔다.
이 격심한 내홍에 빠진 야당은 변변한 대여투쟁조차 펴보지 못한 채 여당의 힘의 강행군 앞에 강·온양파는 분기점으로 밀려갔다. "윤씨가 당대표가 되어 비준파동을 치르게 했더라면…" 민중당에 남은 온건파들마저 이런 말을 할이 만큼 야당이 겪은 수난은 처절한 것이었다.
윤씨의 패배는 윤보선·유진산양씨의 오랜 불화로 인한 민정계 분열에 원인했다. "군정을 이기자면 통합은 성공시켜야 합니다. 선생님이 대통령후보를 포기하십시오" "나는 가인(고김병로씨)에게는 양보해도 우양(허정씨)에게는 양보못하오" 63년 여름 [국민의 당]창당대회가 대통령후보 지명에 걸려 수라장속에 중단된 날밤 윤·유양씨가 이렇게 다툰 것이 불화의 발단이었다.
결국 윤·유양씨는 64년의 [진산파동]으로 충돌했고 유씨는 민정당에서 제명되었다.
6월초 고흥문의원은 세차례나 윤씨를 찾아 진산부대에 대한 관용을 호소했고 창당대회 하루전인 6월13일에는 통합회의 공식대표로 고흥문·김원만·이춘기씨등이 윤씨를 찾았으나"진산과는 당을 같이 할 수 없다"는 윤씨의 완강한 거부를 꺾지 못했다. 이 마지막 교섭마저 실패하자 반윤전열도 굳어졌다. 민정·민주양당의 통합원칙에 합의한 13일밤 11시 을지로에 있는 새마을식당에서 유진산·고흥문(민정)·조재천·홍익표(민주)·김도연·주도윤 (자민)씨등 반윤사단의 대표 11명이 회합, 윤보선씨를 당대표로 선출치않기로 결의한 것은 바로 윤·유 두 사람의 확집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윤씨는 14일 새벽에야 반윤전열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윤제술씨의 전략에 따라 대회 치사에서 유진산씨와의 화합 가능성을 비쳐 보이기까지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그가 하루만 앞당겨 볼 수 있었던들 허물 수 있었던 57표차의 벽에 걸려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동안 여러차례 파동을 치른 파벌의식 그로인한 대립, 정치하는 자세부터 달랐던 강·온 논쟁은 언제고 한계점에서 폭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야당은 민정가도에서 범야단일을 염불했을 뿐 공화당이란 새 세력의 성격 규정도, 대처할 행동반경도 세움이 없이 집권세력이 깔아놓는 가도를 이끌려 가는데도 숨이 찼다.
다수의 생각을 집약하는 이념의 정립은 애초부터 생각밖의 일이었고 파벌의 이해에 얽혀 대립을 보태가는 사이에 불신과 적의가 [사꾸라]라는 악몽이 서로를 찢고 할퀴게 했다. 야당은 거센 군사혁명의 열풍을 겪고도 탈피하지 못한 파당의 악순환을 되풀이했고 이 결과 들 스스로가 세운 통합의 이정표는 매몰되고 만 것이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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