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절박한 희귀 난치병 가정 제대로 지원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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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컨벤션센터에서 중증 희귀 난치병인 근육병 환자들을 돕기 위한 송년의 밤 행사가 열렸다. 가수 션과 타이거JK, MC 박수홍 등 연예인들이 나와 재능 기부 공연을 했고, 이를 지켜본 수백 명의 시민이 조금씩 지갑을 털었다. 행사를 주최한 환자 모임과 승일희망재단은 지난 수년간 전문요양소 건립을 위해 애써 왔지만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어서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가수 션은 “정부 지원제도로는 요양병원 건립이 불가능해 우리가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근육병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끔찍한 질환이다. 간병인이 하루 종일 곁에서 환자를 돌봐야 한다. 인공호흡기·가래제거기 등 의료기기를 늘 달고 다녀야 하는 데다 치료법이 마땅치 않은 질환이어서 일반병원에서 진료를 기피하는 경우까지 있다. 일본처럼 24시간 전문 간병인 제도와 요양시설 운영이 필요하지만 우리 복지망은 아직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에 역부족이다. 환자 가족인 박성자씨는 “가족들이 일을 중단하고 환자에게 붙어 있다 보면 웬만한 중산층 가정도 수년 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아픔을 겪는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근육병 환자의 어려운 처지는 알지만 일부 질환만 집중 지원할 경우 나머지 질환자들이 특혜 시비를 제기할 수 있어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근육병같이 생사를 헤매는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미흡한 것은 예산 자체가 적었던 이유도 있지만 현행 희귀 난치병 지원제도가 정책 방향을 확고히 잡지 못한 채 질환 수만 늘려온 탓도 크다. 한 예로 의료비 지원 대상(일반 가정) 희귀 난치성 질환은 2001년 4종에서 올해 134종으로 지난 11년 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예산은 87억원에서 315억원으로 늘었을 뿐이다. 지난달 말에도 무료의료급여 지원 대상(저소득층) 희귀 난치성 질환에 37종이 추가됐다. 정부가 환자 단체나 의료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상 질환을 크게 확대하면서도 예산은 소폭 늘렸으니, 환자 절박성과 질환 경중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나눠먹기 집행이 불가피했다.

 지원 대상 중에는 근육병·내분비대사병같이 발병 원인과 치료법을 밝혀내지 못한 치명적인 질환도 있지만 ▶생명에 크게 지장이 없는 희귀 질환 ▶단순히 치료가 잘 안 되는 만성질환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보건당국은 ‘희귀하면서 치료가 힘든 질환’만이 아닌, ‘희귀하거나 치료가 힘든 질환’까지 범주에 넣어 느슨하게 관리해 온 측면이 있다.

 복지 혜택은 임금과 같이 하방경직성이 강해 한번 준 혜택을 다시 거둬들이기는 매우 힘들다. 현행 지원 대상 질환과 지원금 규모를 축소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앞으로라도 희귀 난치병 기준을 분명히 정해 대상 질환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질환의 성격과 증상의 경중에 따라 등급을 나눠 치명적인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가정에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 복지 재원을 무작정 늘릴 수 없는 만큼 희귀 난치병 관리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정부 예산만으로 수많은 중증 희귀 난치병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어렵다면 민간의 동참을 이끌어 낼 방안을 함께 찾아야 한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계는 매년 루게릭병 환자들을 후원한다. 대기업이 자신의 기업 철학에 적합한 특정 질환을 지정해 집중적으로 도와주는 사례를 선진국에선 흔히 본다. 국내에선 여력이 있는 대기업·단체조차 특정 질환을 후원하면 다른 질환 단체들이 몰려올까 두려워 아예 지원을 기피하는 풍토가 있다. 획일주의 함정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도와줄 수 있는 분위기와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데도 지혜를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