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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11월17일|상승작용한 실정과 외세|따지고보면 황제나 대신들 항거만으론 배제할 수 없었던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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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제적 정황|박준규씨>
소위 을사보호조약-을사협약-오조약이란 1905년 (광무9연) 11월7일 조인된 한·일 협상조약을 말한다. 해조약은 제l·2·3조에서 일본정부가 금후한국의 대외관계를 감리 지도하고,일본의 외교대표 및 영사가 재외한교의 이익을 보호할 것, 한국정부와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이행은 일본정부가 책임지고 한국정부는 금후일본정부를 경유하지 않고서 타국과 조약 및 협정 등을 체결하지 않을 것, 일본정부는 한정의 외교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통감]을 서울에 주재시킬 것 등을 명시한 것으로서 한말로 한국의 대외주권을 일본이 박탈한 조약이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의 배후지원과 미국의 정신적 지지로써 간신히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이용하여 추밀원의장 이등박문이 선두에 서고 주한군사령관 육군대장 장곡천호도 헌병사령관 육군소장 명석원이낭이 직솔한 수10명 왜병의 무력시위 하에 한황과 삼정대신 한규설이하 8대신을 위협, 공갈하여 그들을 각개격파전술로써 습복케 한 다음 강제조인을 강행한 것이다.

<왜병의 감시 받은 조정의 어전회의>
조인당일 4, 5시간이나 계적된 한정어전회의에서 고종은 "이 협약의 인허는 곧 망국이므로 짐은 사직에 순할지언정 결코 인허하지 않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하였으나 왜헌병의 감시와 이등 및 일공사 임권조의 강압에·못 이겨 마침내 "정부에서 협상조처하라"고 책임을 포기하였다고 하며 이등의 개별공세에 삼정대신 한규설, 도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형만은 끝내 항거하고, 그 외의 5대신이 굴복함으로써 불법조인 되고 말았다.

<5대신은 굴복해 고종에게도 책임>
그때부터 세인은 굴복한 5대신을 저주 증오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보호조약강제조인의 책임이 5대신에게 한정 될 수는 없을 것이며 최고책임은 아마 고종황제에게 귀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내외정세가 황제나 책임대신의 항거만으로 일본의 침략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때 모든 사태는 장구한 세월에 누적된 병폐와 실정 및 한역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미묘한 움직임의 상승작용의 결과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대신으로서는 물론 끝까지 의연했어야 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죄과는 마땅히 역사에 남아야 하겠으나 당시의 현실은 가사 그들이 끝내 항거하였더라도 제2, 제3의 5대신이 나왔을지도 모를 형편이었으니 기막힌 일이었다.

<노·일 개전하자 또 공수동맹강요>
을사보호조약은 1904년2월23일 조인된 한·일 의정서와 부가분리의 관계가 있다. 노·일개전의 직전 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동년1월23일). 그러나 노군에 대하여 포문을 연 일본군은 2월9일에는 자의로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로 들이 닥쳤으며 삼엄한 군사분위기에서 한정을 강압하여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 의정서의 조인을 완료하였다(23일).
그로써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신뢰하고 시정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듣고 (제1조), 일본은 한국황실의 안전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인하고 (제2, 3조),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한국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유할 경우 일본은 필요한 지지를 취하며, 한국정부는 우의 일본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한 변의를 공여하고 일본은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 사용할 수 있고 (제4조), 양국정부는 상호승인 없이는 본 협약의 취지에 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하지 않을 것 (제5조) 등을 상약하였다.

<고문정치의 시초 경찰·학무도 침식>
그 다음 그해 8월22일에는 한·일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의정서가 조인되어 재정고문으로 일인을, 외교고문으로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을 각각 용빙케 되었으니 이때부터 한정의 재정기능과 외교권능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외에 한국정부의 자진초빙의 형식으로 경찰·학무·군사분야에도 일인고문이 초치되어 소위 고문정치의 남상을 보게되었다.
이상과 같이 노·일 전쟁이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 지배권능을 단계적으로 확대강화 하였으며 [포츠머스]강화조약의 체결 2개월 후에 강행된 것이 을사보호조약이었다. 19세기말 이래로 일본은 국제정세의 기미를 교묘하게 포착하고 정세변동에 변승하여 국력의 발전과 세력권의 확장을 계속하였다.
청·일전쟁 후 노국이 만주경략과 요동진출을 강행함에 지나시장에 대한 위협을 느낀 영국은 재빠른 일본의 동맹제의를 받아들여서 영·일 동맹조약의 체결을 보았으니 (1902년1월30일) 그로써 일본은 "한국에 있어서 그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간섭을 필요로 할 소동의 발생에 의하여 침략당할 경우 해리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되고(동조약 제1조) 장차로 노국과 전쟁할 경우 영국의 배후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노국의 배타적 동북아 정책(특히 의화단사건이래의)에 대항하여 문호개방을 강조한 미국도 영·일 동맹과 일본에 대한 정신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동북아의 노세를 구축하기 위하여 영·미의 지원과 지지하에 일본이 노국과 들러붙은 것이 노·일 전쟁이었다고 함직하다.
1905년8월12일, 즉 노·일강화회담이 개최된지 3일 후 제2차 영·일동맹이 강인되어 일본은 "한국에 있어서 정치적군사적 경제적으로 탁월한 이익을 보유하므로 해리익을 옹호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감리 및 보호조치를 한국에서 취하는 권리"를 획득하였으니 그로써 노국을 쳐 무찌른 전공의 대가가 일본에 부여된 것이다.
노·일 강화조약에서도 "노국은…일본의 한국에 있어서의 필요한 지전보호 및 관리조치를 간섭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으며(제2조), 미국은 미국대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당시의 [디어도·루스벨트]대통령부터가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슬라브]족의 장내는 강대적인 전제주의의 지배하에 있는 한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고, 노국에 거주하는 것보다는 일본에 거주하는 것이 행복할 것이며, 일본은 노국을 타도하여 승리할 것이고, 충심으로부터 일본의 승리를 축복한다고 하였다.
일본해 해전후에는 일본의 공업력과 군사력을 찬양하고 일본인의 정직성을 칭찬하였다. 더욱 그는 "강화가 되면 일본은 완전히 자주능력이 없음을 증명한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장악하여야 할 것이며, 여순과 그 주변에 있어서의 노국의 권리를 승계하는 동시에…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만주의 문호개방을 보장하고 만주를 지나에 반환하는 내용의 강화조약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The letters of Theodore Roosevet, edited by Elting E.Morison,1951.7Vls 그중 제4·5권 참조)
뿐만 아니라 그는 노·일 강화회담의 개최를 중간에서 알선하고 노국을 견제하여 청화조건을 일본에 유리하게 유도하고 사사건건에 일본을 위하여 최대한의 호의와 협조를 아끼지 않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1905년 7월 [태프트]미 국무장관과 계일본수상 사이의 비밀협정에서 일본은 비율빈에 대한 침략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점령 상태를 승인하고 전후의 독점적 지배권능을 용인하였다.
역사를 회고하면 항상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능의 확대와 침략의 강행을 스스로 합법화 내지는 합리화하는데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치밀한 계획과 지속적이고 끈덕진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북아 혹은 세계정세의 추이에 변승하고 한역에서는 이익기반의 확대정책과 병행하여 친일분자들을 규합하여 일진회 등의 주구도당을 형성하고 이들을 조종하여 망국·반역적인 민의와 여론을 조작하는 등의 고등정책까지 구사하였다.
그 결과 한국내의 일본세력과 영향력은 나날이 강화되고 일본의 앞잡이 세력은 국기를 좀먹는데 여념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을사보호조약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통분을 금할 수 없는 굴욕조약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치는 그러한 일본의 침탈행위를 조장하고 또 합리화하였으며 한국의 국내사정은 그처럼 포악한 일본정책을 포기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눈에서 불이 나올 일이었다.
을사조약의 역사적 교훈을 살리는 길은 왕시를 회상하여 그저 비분강개하거나, 모든 책임을 개개인의 대신에 돌리고 그들을 저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인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 있다고 하겠다. 동북아 혹은 세계정세와 관련된 일본의 국제적 지위와 정치적 역할, 일본세력의 한국침투의 과정과 양상 및 그에 따르는 한국내의 정치·경제·사회적 변동 등 모든 여건을 종합 고찰하여 역사의 전철을 피하는데 힘써야하겠다. (서울대 문리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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