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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현실참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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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 나라에 대학이 많다고 한다. 매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학사에 대한 사회의 수요량은 50%미만, 게다가 1백 달러도 넘지 못하는 국민 소득은 대학 교육을 경제적인 사치라고 까지 조롱 받게 하고 있다.
대학이 사회와 동떨어져 가교 없는 이방 지대라는 비난 마저 듣게 되는 이유의 하나다.
그러나 성균관을 처음으로 한 우리 나라 고등 교육 5백 년 사를 거슬러 보면 대학은 시대마다 사상형성과 사회개조의 전위 역할을 해왔다.
우리 나라 대학 교육의 제 1기는 이조 때 성균관-교육내용은 철저하게 중국적으로 당시 유학의 본산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자국에 관한 것은 몰라도 중국에 대해서는 잘 알았고 또 자랑했다. 이러한 교육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다』는 생각을 낳아 어느새 사대사상의 씨를 심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육은 옛것을 숭상해서 『진리는 이미 고인에 의해 발견된 것, 옛것은 새것 보다 낫다』는 보수주의를 낳았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의 생활방식에까지도 의존심과 아부 근성을 조성, 오늘날까지도 암이 되고 있다.
제 2기는 일제하의 식민지 교육이다. 일본은 36년간의 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을 완전히 동화시키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일본의 문물에 친근감을 갖는 이도 적지 않아 사대사상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주인만 바뀌었다. 일본은 우리 학생들에 대한 대학 진학의 문을 좁히는 한편 중농정책으로 농업 의존의 후진적 경제 조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오늘날 농업국이 된 것도 그때 일본의 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대학을 「레지스탕스」의 본거지로 만들어 삼일운동에 앞선「동경 독립선언」등 항일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한편으로 학생들은「아는 것이 힘」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농·어촌에 대한 「브·나로드」운동을 전개, 오늘날 대학생 향토개발 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대학 교육의 제3기는 해방이 되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대한 반항 기질은 해방 후에 현실에 대한 학생들의 욕구 불만이 겹쳐 기성세대를 불신하는 거센 현실 참여의 풍조를 이루었다. 이래서 해방직후 학생들이 좌우익으로 갈려 싸움을 벌인 것으로부터 「4·19의거」와「한·미 행정협정체결 촉구」「한·일 회담 반대」등 줄을 잇는 「데모」는 사태가 날 지경이었다. 그 중에는 4·19와 같이 큰 사회 변혁을 일으킨 것도 있다.
특히 4·19이후 「데모」만능이란 유행어가 생겨날 만큼 「데모」의 위력은 대단했다. 학생들은 「데모」등 현실 참여 이유로 「일제 30년의 투쟁경력」을 내들고 『후진국에서는 야당이 제구실을 백% 다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여당과의 힘의 불균형을 조절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얘기하는 이가 많다는 관계관의 분석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학생 「데모」는 15%의 학생이 나머지 85%를 좌우 할 수 있을 만큼 목적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결여하고 있다 한다. 서울 시내 모 대학의 경우 지난 4윌14일부터 8월17일까지 4개월 동안 1백71회의「데모」또는 성토를 벌여 평균「3일만에 2번」이라는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제는 조용히 민주 사회 건설을 위해 대학사 5백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 본연의 자세에서 보자』 는 문교부 강성익 장학관의 예기다.(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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