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성공하려면] 7. '칼' 아닌 '원칙'으로 무장한 정부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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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하면 조세문제를 비롯, 모든 문제를 철저히 조사해 문제가 없는 경우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하겠다."(2002년 12월 17일,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나는 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를 인신 구속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를 청와대로 불러 '당신은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경제를 염려해 사면할 것'이라고 통보해주었다. 그는 뜻밖의 관용에 크게 놀라면서 대단히 고마워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하권 92쪽)

"대한항공은 근본적으로 전문경영인이 나서서 인명 중시 경영체제로 바뀌어야 한다."(1999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

"외국에 나가든지 YS를 밀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고 한다. 대통령의 뜻이다. "(92년 초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노태우 대통령의 뜻을 모 의원에게 전하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이같은 말들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영영 사라져야 한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세무조사도, 구속도, 사기업 최고경영자 인사도 입맛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전직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자랑처럼 그런 일을 이야기하고, 노무현 당선자도 벌써 '세무조사'를 들먹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항공의 경영체제에 대해 언급한 이틀 뒤 당시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작고)은 물러났다.

역대 대통령들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곤 했다. 검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칼'을 활용하면 안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문제는 그런 착각이 착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종종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괘씸죄'라는 웃지 못할 용어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보복.정계개편 등 정치적 목적을 위해 권력기관의 칼이 동원됐는가 하면, 국민정서에 편승해 인기를 얻기 위해 권력기관이 나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기관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한 결과는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 정치보복과 부패였다. 더욱 심각한 후유증은 법과 정부에 대한 신뢰의 실종이다.

'칼'을 뽑을 때면 언제나 '법대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심과 여론은 법 집행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채곤 했다.

95년 2월 최종현 선경(현 SK)그룹 회장(작고)이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업종 전문화 등 정부 정책을 비판하자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은 돌연 선경그룹 계열사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최종현 회장이 홍재형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찾아가 사과한 뒤 정부 조사는 서둘러 마무리됐다.

대통령이 툭하면 개별사안에 대해 '엄정 수사'를 지시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은 항상 엄정수사를 해야 하는 기관이지, 어떤 일을 골라 엄정 수사를 하는 곳이 아니다.

특수부 검사출신인 한 변호사는 "하명 수사나 권력층에서 관심을 갖는 수사는 편향되게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실토한다. 청와대나 권력층이 개별사안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표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DJ 정부에서 옷로비 사건, 이용호 게이트 등을 놓고 검찰이 이미 수사했던 사건을 특별 검사가 재수사하고, 특검이 손대면 검찰이 밝혀내지 못했던 사실이 새로 나왔던 것도 특검과 검찰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수사의 의지 및 범위'에 있을 뿐이라고 이 변호사는 지적했다.

"법 집행의 원칙은 '균형'이다."

이건춘 전 국세청장은 법 집행이 균형을 잃을 때 법과 정부는 권위를 잃고 만다고 지적한다.

"누구는 속옷까지 다 벗기면서 누구는 외투만 벗기는 식의 법 집행은 곤란하다."

그러다 보니 막상 지켜야 할 법과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우리 현실이다.

불법 파업이 있어도 법 적용은 국민정서 등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대도시 시내 대로를 점거하는 시위는 허가받을 수 없는 데도 그런 시위는 너무 자주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은 강한 정부를 원한다.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혼란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강한 정부는 권력기관의 칼을 휘두르는 정부가 아니라 원칙을 지키는 정부다. 칼을 휘두르기는 쉽지만 모든 일에 원칙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강경식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

김병국 고려대 교수는 역대정권에서의 자의적 법 집행이 결국 법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정작 주요한 정책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대통령이 관여해서는 안되는 '정쟁'의 영역에서는 엄청난 권한을 행사하고, 대통령으로서 막상 챙겨야 할 '정책'의 부문에서는 능력이 제한되곤 했다."

정권이 바뀌기만 하면 늘 정치보복이다, 법대로다 하며 맞붙는 정쟁에 휩쓸렸던 것이 그간의 경험이었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법치와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은 결국 대통령의 몫이다.

김문희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이 '금단(禁斷)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해결의 열쇠는 대통령의 결심이다. 권력기관의 '칼'을 자의적으로 뽑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금단(禁斷)의 고통을 잠시만 견뎌주면 문제의 절반 이상이 풀릴 것이다."

김수길 부국장, 이하경 정치부 차장, 김종혁 국제부 차장, 이세정.고현곤.송상훈 경제부 차장,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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