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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나들이 병」 겹친 과잉 외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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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아웅산 사건에서 또 하나의 궁금함은 처음 순방 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버마가 어떤 결정 과정을 거쳐 추가됐느냐는 점이다.
당시 많은 외교관들은 버마가 정상 외교의 대상으로선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버마는 비동맹 주류에서 이탈해 정치적으로 외톨이어서 정상 외교를 하기엔 미흡한 나라였지요. 대외적으로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독자노선을 가는 것 같았지만 현지에 가보면 김일성의 독재에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거든요. 실권자 네윈이 꼭두각시를 내세워 놓고 사실상 종신집권 독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관찰할 것이 있었다면 실권자가 국정을 섭정하는 테크닉 정도였을 거예요.』(외무부 W씨)
이런 실상 때문에 버마 방문을 이범석 외무장관 자신이 찜찜하게 생각했고 이계철 대사도 내심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노신영 안기부장 역시 반대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계획 허술>
당시 핵심 관계자들 중 버마에 가자고 주장한 사람이 아직까지 부각되지 않아 버마 방문은 한국 외교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 때문에 전 두환 대통령이 퇴임 후 네윈식 섭정 정치를 현장 학습하기 위해 갔다는 추측까지 나돌았다.
당초 전 대통령은 버마는 가지 않고 바로 인도로 갈 생각이었다. 인도 방문이 처음 거론된 것은 82년초 노신영 외무장관 시절이었다.
노 장관이 올린 안에는 인도·호주·뉴질랜드·파푸아뉴기니 등 4개국이었다. 그러다가 82년 6월 이 장관이 취임하고 83년 들어 「국화 계획」이란 코드네임으로 서남아·대양주 순방 계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됐다.
76년부터 4년 2개월간 인도대사 시절 특유의 외교 감각과 사람 사귀기의 실력을 과시했던 이 장관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버마가 추가된 것은 83년 5월 초. 파푸아뉴기니가 빠지고 스리랑카와 함께 포함되면서 첫 방문지로 결정됐다. 인도로 가는 도중 중간 기착지를 찾다가 마땅한 나라가 없어 끼워 넣었다는 관측도 있다. 순방 6개국 마지막인 브루나이는 자원 외교도 할 겸 경관이 기가막히다며 K모 장관이 추천했다. 비서실 출신 T씨의 주장.
『파푸아뉴기니가 방문국에서 빠져 3개국만 다녀오기에는 쉽게 말해 성이 안찬 겁니다. 호주·인도와는 방문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인도와 같은 비동맹국가·제 3세계를 찾다가 버마가 낙착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인도로 가는 중간 기착지의 의미도 있었거든요. 중간 기착지로는 말레이시아의 페낭도 거론됐으나 82년 아프리카 방문 때 거처간 곳이어서 빠졌고 방콕은 이미 아세안 순방 때 방문한 곳이지요.』
버마 방문이 결정됐지만 랑군 공항의 활주로가 전 대통령이 타고 갈 보잉 747이 착륙할 수 있는가가 문제로 등장했다. 또 5월에 버마 정보책임자인 틴우 장군의 숙청과 정정 불안이 우려되기도 했다. 네윈의 독재, 종족 분쟁으로 우발적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소리가 많았다. 이런 문제를 놓고 이 장관의 외무부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장관 측근들은 이 장관이 버마 행에 수동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청와대와 안기부 출신들은 버마 행을 외무부 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장관의 부친이 일제시대 버마에 사업차 방문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객사해 이 장관이 더 찜찜해 했다는 얘기도 외무부에 전해 오고 있으나 이 장관의 부친은 실은 만주에서 숨졌다고 한다.
외무부 관계자 Z씨의 증언.
『버마가 추가된 것은 기왕 갈 바에 한나라를 더 끼워 넣자는, 좀더 짜임새 있는 정상 외교를 하자는 취지에서 들어간 겁니다. 전 대통령과 이 장관 대화에서도 자연스럽게 추가 문제가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파푸아뉴기니 대타>
전 대통령은 북한과 더 친한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비동맹에서 대 북한 우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낄 수가 있었지요 .버마에 방문 의사 타진을 해보니 예상보다 빨리 좋다는 답변이 왔어요. 이 장관이 소극적이었다는 얘기는 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노신영 부장이 타당성 측면에서 반대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우세했다고 할 수 없었지요. 네윈식 통치 현장 학습을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통령 임기가 4년 이상이나 남은 그 시점에서 절실한 문제일 수 없지요. 버마 방문은 제 3세계와 비동맹 외교에 투자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전 대통령 특유의 나들이 병도 작용했지요.』
전 대통령은 5공 초기에 부지런히 다녔다. 81년에 미국 그리고 아세안 5개국, 82년에는 아프리카 4개국과 캐나다. 보통 14박 15일, 15박 16일짜리의 순방이다. 그런 만큼 정상 외교의 과잉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여러 해프닝도 벌어졌다. 아프리카가 그렇게 갈만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수긍이 잘 안 된다. 노신영 외무장관의 계획에 대해 이 범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반대했지만 아프리카 순방은 이 실장이 장관으로 옮겨 수행했다. 따지고 보면 전 대통령이 그만큼 격식을 갖춰 다니기를 좋아한 것이다.
아프리카방문 때 케냐에서는 직전에 쿠데타 미수 사건이 있어 긴장했다. 그리고 가봉에서는 북한 국가 연주 사건이 있었다. 82년 8월 22일 가봉 공항 환영 행사 도중 연단에 전 대통령과 봉고 대통령이 올라가면서 악대가 양국 국가 연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애국가가 안나오고 이상한 노래가 나왔다.
그 순간 장세동 경호실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시 수행한 Q씨의 증언.

<장 실장 "스톱 스톱">
『우리가 언제 북한 국가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 듣는 곡조가 나와 애국가를 편곡했나 생각했지요. 그 순간 장세동 실장이 군악대를 향해 뛰어가는 것이 보였지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장 실장이 악단장의 지휘봉을 손으로 탁 쳐서 떨어뜨리더군요. 그리고 스톱, 스톱하고 소리치면서 소동이 있었지요. 전방에서 북한의 확성기 방송을 들은 경험이 있는 장 실장만이 북한 국가라는 것을 알고 중단시킨 겁니다.』
북한 국가를 연주한 가봉 헌병 군악대는 당초 행사 팀이 아니었다. 공항 환영 행사를 맡은 악대가 전날 다른 도시에서 행사를 하고 교통편이 마련되지 않아 돌아오지 못해 대타로 나온 것이다.
『연습도 안한 상태에서 악보를 꺼내들고 나왔는데 리퍼블릭 코리아라는 명칭을 보고 남한인지 북한인지 따지지 않은 거지요. 고의가 아니라 실수에 의해 일어난 거지요. 저녁 만찬에서 봉고 대통령은 정식 사과를 했지요.』
아웅산 비극은 무리한 정상 외교, 제 3세계에 대한 과잉 투자에서 싹텄고 그 틈새를 북한이 노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정통성 약한 정권의 변칙적 존재가 가져온 부작용이기도 했다.<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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