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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언론 숙정·통폐합|이상재씨 해직대상기자 「넣고 빼기」맘대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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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허문도와 이상재, 그리고 이광표-. 이들은 80년 언론대학살과 관련, 언론계에서는 결코 잊지 못할 이름이다. 편집된 이상과 권력추구의 야망을 바탕으로 구상된 허씨의 대학살극 시나리오는 서슬 퍼런 신군부의 비호아래 두 이씨에 의해 결국 실천에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광표씨는 보기에 따라서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 앞에 마침 문공장관이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응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할 소지가 있다고 볼는지 모른다. 실제 당시 그의 역할은 「3허」를 대신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는데 지나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그는 허문도씨와는 달리 신문사에서 기자부터 편집국장대리까지 지냈다는 점에서 지금 와서 무슨 말로 변명해도 설득력이 별로 없다는 게 중론이다.
반면 이상재씨는 80년 당시 언론계에서는 염라대왕과 같은「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는 9월 청와대 사정비서관 (2급)으로 발령 받았지만 계속 계엄사의 검열단 통제업무를 수행, 언론통폐합 이후까지 언론을 주무르는 일을 맡았다.
이씨는 지난 22일 문공위증언에서 『언론검열 관계 일로 언론인들을 많이 만났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무소 부위였다.
그는 기자해직에 직접 칼자루를 들이댄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후 언론통폐합·정계개편과정을 통해 「채찍과 당근」을 들고 언론계를 휘저었다.
그는 수백명 기자의 목을 자르고 대신 수십명 언론계 출신을 정계나 관계로 안내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가 얼마나 막강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있다. 당시 문공부에 근무했던 Y씨의 증언. 『그는 자신을 「강기덕」전무라고 소개하더군요. 신문사에 전화를 할 때 항상 「검열단의 강인데요」라고 했지요. 처음 이씨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었습니다. 언론인들이 그를「스트롱 맨」(강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언론파트를 맡고 있었던 공보국 쪽에서 강보좌관의 지시라며 부리나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그의 위세를 실감했습니다. 「강」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허둥댔거든요. 당시 문공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수족에 불과 했었으니까요.』
그가 언론가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7, 8월 언론인 해직을 주도하면서 보인 힘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기자들의 생살 여탈권을 갖고 있었다. 보안사·안기부·경찰이 임의대로 작성한 이른바 해직기자 명단이란 것을 가지고 맘대로 「빼고 넣으며」 언론계의 약점을 캐고 언론계를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언론인 해직자 명단에 들어갔다가 이씨의 영향력으로 구제된 케이스도 상당히 있다. 모 신문사의 편집간부였던 K씨, 남편이 이씨에게 부탁했던 C기자 등 여러 사례는 지금도 언론계에 비극적 희극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씨는 언론계의 현황파악을 한다는 구실로 각 언론사의 국장단 및 정치부장·사회부장, 주필·논설위원들을 많이 만났는데 당시 그의 태도는 매우 위압적이었다.
이씨를 두 차례 만났던 모 신문사 논설위원의 증언.
『당시 강보좌관과 만나서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서부터 언론계 일 등 폭넓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때는 논쟁이 붙기도 했습니다. 언론인들은 관념적 민주주의자들이라고 마구 몰아붙이더군요.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기자들을 「죽이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언론인들의 기를 꺾겠다는 생각에서 들으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그에게 잘못 걸려 혼나기도 하고 숙정 대상이 된 언론인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J일보의 K주필이었지요.』 여기서 말하는 J일보의 K주필은 중앙일보의 김승한 주필을 가리킨다.
김주필은 광주사태가 난 후 사설에 광주시민이라고 쓴 표현을 놓고 「시민」을 「폭도」라고 고치라는 계엄사검열단과 맞서 다툰 적이 있다.
그후 김주필은 어느 날 이씨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김씨의 증언.
『이씨로부터 청진동 요리 집에서 저녁을 먹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지요. 가만히 생각하니 서울시경의 계엄사검열단과 전화로 여러 차례 다툰 것이 생각났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갔는데 1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좀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사 주필을 불러놓고 일개 보안사 준위가 전화연락도 없이 늦다니…. 화도 나고 해서 먼저 술판을 벌였습니다. 1시간반쯤 늦게 이씨가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술판을 벌인 게 못 마땅했던지 나를 기죽이려고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기분에 피차 진지한 대화가 됐겠습니까. 별 이야기 없이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7월말쯤 언론인 숙정이 구체화되면서 내 이름이 포함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찍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문사를 떠난 후 여러 곳에 취직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신원조회에 걸렸습니다. 부산대에 가려다 좌절됐고 설립 때부터 관계했던 방송통신대에 서류를 냈는데 그곳에서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할 수 없이 중학동창 정내혁씨를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즉시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신원보증을 서겠다」고 하더군요. 이틀 뒤 발령 받았지요.
그런데 방송통신대에 나간 뒤 치안본부에서 보내온 신원조회서를 보니 「이자는 언론자유투쟁에 앞장선 자이며 김대중과 절친한 사이로 김이 대통령이 되면 문교부장관을 맡기로 약속 받은 자임」이라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씨는 그해 10∼11월에 접어들면서 색다른 역할을 맡게된다. 민정당 창당에 대비한 언론계인사 스카웃작업에 나선 것이다. 언론인 해직을 추진했던 그의 경험에서 얻은 언론계와의 「특별관계」때문에 그 같은 역할이 주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후일 민정당에 참여해 11대 때 경북도지부장을 맡았던 K씨(C일보), 강원도지부장을 맡았던 S씨(H일보), 서울시지구당을 맡았던 K신문의 J씨와 방송사의 P씨, 당시 언론계의 국장급 간부들이 이 시기에 이씨 혹은 민정당 사전 창당작업을 추진했던 권정달·이종찬·윤석순씨 등으로부터 접촉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민정당 충남도지부장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고 언론계에 계속 남았던 모 신문 S국장의 증언.
『10월초께인가 서린호텔에서 권정달·이상재·이종찬·윤석정씨 등 당시 실력자들로 알려졌던 사람들을 만났었습니다. 개혁주도세력이 주도하는 신당에 참여해 달라는 권유를 받았지요. 충남도지부장이라는 직책까지 말하더군요. 당장 거절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여서 조금 끌다가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상재씨가 「전두환 대통령이 사인까지 했다. 그 신문은 괜찮을 것으로 보느냐」고 협박조로 말하더군요.』
이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씨는 언론 검열단 보좌관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언론통폐합에 관해 사전에 알고 있었고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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