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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여름(46)-언론 숙정·통폐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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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0년 5월 22일 나라전체가 온통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던 엄청난 사태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서울지역 신문·방송·통신사 사장들은 보안사에 불러들어 갔다.
당시가 계엄 하이고 20일부터 언론사별로 기자들의 제작거부와 검열거부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이 자리에 참석했던 K사장의 당시 분위기에 대한 설명. 『누구하나 왜, 어떻게 보안사에 불려 나왔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지요. 드디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정보부장 서리가 들어와 「그동안 언론과 대학의 내막은 물론 누가 선동하고 있는지도 샅샅이 알고 있다. 경영권자가 권한행사를 못했기 때문 아닌가. 파악한 뒤(선동한 사람들을) 체포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없도록 사장들이 수습하는 책임을 지길 바란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더군요. 속으로 「아이쿠 큰일이 또 벌어지겠구나」고 생각했지요.』
이 같은 전장군의 경고발언은 6월 9일 아침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 그리고 동아일보에 들이닥쳐 △경향신문 조사국장 서동구 △동 외신부장 이경일 △동 경제부 홍수원·박우정·표완수 △문화방송 보도부국장 노성대 △동 사회부 오효진 △동아일보 사회부 심송무 기자들을 연행하는 사태로 현실화된다.
그러나 이 같은 사태는 7월 말 전 언론인들의 일괄사표제출과 8월초 단행된 대규모 언론인 해직사태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언론계에 대한 이른바 정화작업이 단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은 고위공무원 숙정이 마무리된 후인 7월 초순부터였다.
그때 분위기를 당시 청와대의 한 고위공직자의 증언을 통해 들어보자.
『공무원들에 대한 숙정 작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보안사에 언론 대책반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기자들을 숙정 한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누구누구가 대상이냐」는 등의 질문을 해왔지요.
그러나 아무런 답변을 못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청와대가 무력해져 보고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던 때 였으니까요. 오히려 청와대 쪽에서 출입기자들에게 돌아가는 사정을 「취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7월 중순쯤인가 D일보의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K기자가 숙정 대상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됐지요. 그래서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7월 중순쯤에는 각 언론사에서 모든 루트를 통해 숙정 시기와 내용을 알기 위해 정신 없이 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심지어 당시 언론사를 출입하던 안기부·보안사·치안본부 등의 이른바 기관원들을 둘 잡고 어떻게든지 블랙리스트의 내용을 알려고 취재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 신문사를 출입하던 보안사 요원 L씨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기자들에 대한 숙정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와, 지시를 들었기 때문에 문제기자들의 명단과 문제내용을 상부에 소상히 보고했지요. 물론 수시 보고였습니다. 비리관련 기자들의 명단과 내용은 오래 전부터 각 기관에서 체크해 놓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유착과 체제도전기자들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기준을 세우기가 곤란해서… 여하튼 1차 숙정 명단은 7월 중순쯤에 확정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문사 고위간부들이 끈질기게 물어 오더군요. 그러나 확실한 확정자의 명단을 모르기 때문에 난감했습니다. 대충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대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일부를 흘려주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김 아무개가 포함되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확인하는 질문도 받았습니다.
회사로서는 한사람이라도 더 구제하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나중에 해직된 기자들 명단을 보니까 보고한 사람이 빠져있는가 하면 엉뚱한 사람이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로비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 회사사정도 있었을 테고….」
이때쯤 문공부는 각 언론사 대표들에게 편집국장·보도국장을 포함한 기자 전원의 사표를 7월말까지 받아두는 게 좋겠다는 귀띔이 있었다.
이와 함께 문공부는 사회정화의 일환이라는 명분으로 주간·월간·계간지 등 1백 72개의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하는 조치도 아울러 단행한다.
등록이 취소된 간행물 중에는 기자협회에서 발행해 온 「기자협회보」와 「저널리즘」을 비롯, 월간지로는 중앙일보사 발행의 「월간중앙」 「뿌리깊은 나무」 등이, 계간지로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 간행물들은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해 왔다는 이유였다.
이런 와중에서 7월 5일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이진희 사장은 취임사에서 『새 시대 정립을 위해 언론인은 국가관이 투철해야하며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며『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은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해직사태를 예고한 뒤 경영쇄신 이라는 명목으로 전 사원의 사표를 받아냈다. 그리고는 부장급 이상은 15일, 부장급 이하는 19일에 해직을 단행했다.
「언론인 대 학살」이라고 표현되는 80년 여름의 언론인 해직사태의 서막이었다.
당시 해직기자였던 정상모씨의 증언. 『해직자 명단이 나붙기 며칠 전에 전원 사표제출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일부에서는 「왜 사표를 내느냐」고 반발했지만 워낙 공포분위기였고 「반발해봐야 다치고 희생만 당한다」는 이야기가 돌아 결국은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엔 「다음의 기회를 보자」는 의지도 깔려 있었지요. 그런데 수 백 명의 사표를 받아 며칠만에 심사를 끝내고 해직절정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어요. 사전에 회사측과 권력 측의 각본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어 KBS에서도 19일 1차로 해직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MBC와 KBS조치는 언론인 숙정의 모델케이스였다.
문공부는 각 언론사에 사표수리 기준으로 △부패언론인 △정치권과 유착된 언론인 △시국관이 잘못된 언론인 △언론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운동에 앞장선 언론인 등으로 통보하고 각 사가 자체적으로 해직자 명단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각 언론사는 이 기준에 따라 명단을 작성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유착되거나 시국관이 잘못된 기자들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에 협력자로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언론사 출입 기관원들.
사표수리 선별작업은 각 언론사 사장(혹은 부사장) 지휘아래 중역진과 편집·보도국장이 은밀히 진행시켰다.
당시 이 작업에 관계했던 모 신문사 K국장의 증언.
『정말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매일 만나 고락을 같이하며 신문제작을 함께 했던 동료·후배들의 이름을 거론하자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저쪽에서 요구하는 사람만을 포함시켜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무척 노력했습니다. 명단을 빨리 내라는 독촉은 오고 아무나 써 낼 수는 없고 고통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나 언론사의 이런 고충에 대해 해직언론인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회사가 선별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결과로 보아 권력기관에서 요구했던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다수의 기자가 해직된 것은 회사측에서 귀찮은 존재로 여겼던 사람들을 포함시킨 것이 명백하다. 결국 권력과 언론경영진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여하튼 문공부로 보내진 각 언론사의 해직자 명단은 권력기관에서 취합해 확정된 명단과 비교해 누락자가 있을 경우 다시 되돌려 보내졌다. 각 언론사가 이 같은 수모를 한 두 번씌은 당했다. 이 와중에서 문제의 「명단」취재가 덜된 언론사는 예상되는 인물을 무더기로 올리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해직대상자중에서는 언론사의 간청으로, 혹은 본인이 개인의 연줄로 실력자를 찾아가 부탁해 살아남는 경우도 있었다.
언론인 해직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상재씨는 『어느 한 기관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사이에 명단에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내가 책임진다고 하여 구제된 사람도 있다. 이름을 대면 금방 알만한 사람인데 내가 그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모 신문의 편집간부인 K씨는 주도세력내의 실력자였던 동창들의 보증으로 살아남았는데 그가 이들과 만나본 후 숙정 리스트에 올라있던 동료 P씨에게 권유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P씨는 『그 사람을 만나서 살아 남는다 해도 무슨 꼴이 되며 더욱이 만나고 나서도 살아남지 못하면 더욱 무슨 꼴이 되겠느냐』며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본인대신 남편이 뛰어 살아남은 모 기자의 경우도 있고 당시 어느 신문의 K기자는 국방부를 출입한 덕분에 국방부 쪽에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보증해 살아남기도 했다. 또 회사에서 해직대상으로 알았다가 적극적으로 당국 쪽에서 그 사람은 우리가 정화대상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통보해 마지막 단계에서 빠진 경우도 있다.
그런가하면 청와대출입기자였던 D일보의 K기자는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쪽에서 빼보려고 애를 썼는데도 결국 살아남지 못해 당시의 청와대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케 해주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를 남기며 언론인 대 숙정작업이 마무리될 즈음인 7월 29일과 31일에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통신협회 등 3개 언론단체에서 이른바 「언론자율정화와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이 나온다.
『언론은 언제나 국익을 우선하는 입장을 견지하며… 국가보위·사회정화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언론계 자체가 안고있는 저해 요인을 과감히 자율적으로 척결하며…』라는 내용의 4개항으로 된 이 결의는 바로 미리 준비된 언론인 숙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명분용이었다.
그리고는 8월 2일 중앙매스컴을 필두로 1주일만에 각 언론사가 해직자 명단을 발표했다. 전국 38개 언론사에서 전체언론인의 30%에 해당되는 7백 여명이 무더기로 언론계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 같은 숙정 작업이 마무리된 직후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8월 11일 MBC·경향신문의 이진희 사장과 가진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인·문화인·학자 등 지식인들의 역할에 대해 『언론인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국가사회를 지탱하는 지주의 하나임은 틀림없으나 일부 몰지각한 비판행위가 국론분열의 큰 요인이 되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며 『지식인들도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해 민주국가발전에 동참해야 할 것이며 조국에 대한 비판만을 일삼는 태도는 지양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다가올 「한국 언론의 겨울」을 예고하는 듯했다.
여하튼 이처럼 언론인 숙정을 마음먹은 대로 끝낸 신 군부 주도세력은 자신감을 얻은 듯 언론 통폐합이라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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