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가득 찬 현실과 경계선 너머에 대한 상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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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쪽에 한방 먹이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중세를 온통 암흑 치하’로 볼 근거는 없는 것 같다"

실제로 10세기 이전의 중세 초기. 그리고 아마 전환기 이후의 얼마동안은 야만족들의 문명과 로마의 유산, 기독교적―동양적 색채의 온갖 요소간의 매혹적인 대화로 가득 찬, 정신적으로 엄청난 활력을 띤 시대였으며 여행과 (유럽 전역을 사방으로 떠돌며 이념을 전파하고 독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것을 촉구하였으며, 온갖 미신의 정체를 낱낱이 폭로한 아일랜드의 승려들과 사방에서 부딪힐 수 있는) 조우의 시대였다. 대평화가 붕괴되자 위기와 불확실성이 나타나며, 다양한 문명이 상호충돌하고 차츰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난다.”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조형준 옮김, 새물결)에 나오는 움베르토 에코의 이런 언급은 르네상스에 억눌린 중세 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 역동성에 대한 갈망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현대의 분야가 바로 판타지 소설일 것이다.

하지만 서점가를 다니다보면 중세의 문학이 판타지 소설이 선호하는 북구 신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에코가 말하는 중세의 역동성이란 원탁의 기사들이 펼치는 기나긴 여로, 르나르의 능청스러운 우화, 일본 궁정의 도저한 허무주의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 출판에서 중세 원전이란 서가 하나를 채울 수 없는 분야지만, 그래도 맛은 볼 수 있다.

삶과 죽음, 현실과 비판에 대한 역동적 상상력
최근에 출간된 『여우 이야기』(이형식 옮겨엮음, 궁리)는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 고대 프랑스어로 씌어진 우화집으로 총 27편으로 구성됐다.

대부분의 중세 문학이 그렇듯 아직 저자 개념이 없어 여러 작가들이 1백 여 년에 걸쳐 완성한 중세 풍자문학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여우 르나르를 비롯한 동물들이 등장해 모험담을 펼치지만, 그 이야기가 당대를 떠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직 미친 자만이 자신의 망상을 따라 움직이리니. 미친 자의 망상에는 숱한 찌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미친 자만이 허황된 희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리니. 이 세상이 온통 무상함뿐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신은 인간을 자기 멋대로 희롱하노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가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도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고해 신부를 삼켜버린 르나르’를 보면 수도원에서 닭을 훔쳐먹다가 혼쭐이 난 여우 르나르에게 솔개 위베르가 고해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르나르가 위베르에게 자기 죄를 털어놓는가 싶더니 웬걸, 결국 르나르는 위베르를 통째로 삼켜버린다. 이 둘이 나누는 대화 속에 당시 성직자들에 대한신랄한 비판이 들어 있다.

‘고해 신부를 삼켜버린 르나르’의 앞부분에 나오는 중세적인 세계관은 14세기 일본의 요시다 겐코가 지은 『도연초』(채혜숙 옮김, 바다출판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표제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 온종일 벼루를 마주하고 앉아 마음속에 떠오르는 걷잡을 수 없는 상념들을 두서없이 적어 가노라니 묘하게도 기분이 상기되어 온다”는 서단 ‘한가로움’에서 나왔다. 즉 붓 가는 대로, 생각이 흐르는 대로 쓴 글을 모은 책이라는 뜻이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서 남북조의 동란이 한창이던 혼란기에 씌어진 까닭에 『도연초』에는 현세에 대한 불안, 무상(無常), 허무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따라서 여우 르나르가 지구 저쪽에서 인간 세상이 동물의 세계 수준이라고 말하는 동안, 요시다 겐코는 유사 이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간들은 늘 그대로 변함없는 희로애락의 세계를 살아간다고 설파한다.

“젊었을 때에는 혈기가 왕성하고 마음은 어떤 작은 일에도 동요되기가 쉬우며 정욕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다시 개선하여도 별 소득이 없는 일은 개선하지 않는 편이 좋다” 등의 잠언풍의 말은, 그러므로 피할 수 없다. 이 책은 모두 2백44단의 길고 짧은 글을 모았으며 그 내용은 자연, 인생, 생활, 학문, 정치, 예능 등 다양하다. 21세기와는 꽤 많은 시간차가 있음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 세상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13세기에 씌어진 『성배의 탐색』(알베르 베갱과 이브 본푸아 엮음, 장영숙 옮김, 문학동네)은 중세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아서 왕 이야기와 성배의 전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아서 왕 이야기의 최종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성배’로 상징되는 신성성의 구현이라는 주제를 향해 모든 이야기가 배치되는 탄탄함을 보여준다.

앞에 소개한 두 책과 달리 같은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면서도 『성배의 탐색』은 무상과 허무보다는 순결한 인간성의 승리를 말한다. 이는 켈트 신화로 여겨진 아서 왕 전설이 이 작품에 이르러 기독교화됐기 때문이다.

중세, 우리에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물음
성배를 찾아 수많은 기사들이 여행에 나서지만, 성배에 도달한 사람은 갤러헤드, 퍼시벌, 보호트 등 세 사람 뿐이다. 왜 이 세 사람만이 성배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는 이 중세 로망스를 신학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명의 기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뚜렷이 분리된다. 예언자들에 따르면, 그들 중의 두 명은 동정이며 세 번째는 순결하다. 그들은 오랫동안 편력한 다음 다시 만나, 최고의 심오한 교리에 입문하게 될 것이다. 그들 각자는 영혼의 완성을 위한 단계들 중의 하나를 나타낸다. 이 세 사람이 모두 함께 최후의 전례에 이르게 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불균등하게 험난하고, 그들에게 배당된 법열의 완전도는 불균등하다.”

중세는 불안에 가득 찬 현실과 외연이 끝없이 확장되는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중세 문학에는 현실과 확장된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고루 담겨 있다. 오늘 다시 중세문학을 읽는 까닭은 이 현실과 상상력이 보편적인 지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중세 문학의 힘은 인간의 세계가 한결같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김연수/ 리브로)


■ 여우 이야기

■ 도연초

■ 성배의 탐색

■ 베오울프

■ 겐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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