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들이 어떻게 바다에 오셨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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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홍기태 서울고법 부장판사(오른쪽 둘째)가 26일 전남 고흥군 고흥만방조제 앞바다에서 배에 탄 채 이흥남 고흥군청 계장(오른쪽 셋째)으로부터 이 일대 어업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 26일 오전 10시 전남 고흥군 고흥만방조제 선착장. 이흥남(54) 고흥군청 계장이 지도를 가리키며 “방조제에서 담수가 나와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어민들의 어장 중 가장 가까운 곳도 6.5㎞나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곁에 서 있던 전상율(55) 어촌계장은 “어민들은 지도와 수치가 아니라 몸으로 피해를 느낀다”고 말했다. 둘의 주장을 듣고 있던 홍기태(50)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먼저 배에 올랐다.

 “자, 한번 직접 둘러보러 가시죠.”

 이날 홍기태 부장판사, 김무신·기우종 판사와 군청 관계자, 어민 등 20여 명을 실은 배는 2시간 동안 방조제 인근 바다를 둘러보며 지도와 실제를 비교했다.

 #2. 같은 날 오후 3시 고흥군법원 법정. 여덟 살 때부터 물질을 한 해녀 양선희(66·여)씨가 증인으로 섰다. 양씨는 “2005년부터 해초가 눈에 띄게 사라졌다”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하루 7만원은 벌었는데 이제는 하루 2만원 벌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흥군 측 변호인은 “양씨는 환갑이 넘어 수심 5~6m 아래 어장까지 내려가지 못한다”며 “실제 피해를 알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국내 최초의 ‘찾아가는 법정’이 열렸다. 환경전담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 홍기태)가 서울에서 380㎞나 떨어진 전남 고흥에서 현장검증을 한 뒤 현지에서 재판을 한 것이다. 고흥군 어민들로 구성된 10개 어촌계는 “고흥만 방조제 개발사업 때문에 어획량이 줄었다”며 국가·고흥군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부가 현장검증을 나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재판을 연 것은 처음이다. 고흥군 도덕면 용동리~풍류리를 잇는 2.8㎞ 길이의 고흥만 방조제는 3900억여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아 1995년 완공됐다. 어촌계 측은 “방조제 4개 갑문에서 오염된 담수를 쏟아내 조개·해조류 생산량이 2005년 이후 매년 20%씩 줄었다. 개발 비용을 댄 정부와 방조제를 설치·관리한 고흥군에 책임이 있다”며 2007년 11월 100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지난 7월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재해 등의 영향을 감안해 배상 범위를 70%(약 72억원)로 제한했다. 고흥군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쟁점은 방조제의 담수 배출이 어업에 실제 피해를 끼쳤느냐다. 이날 군청은 방조제 인근 하수처리장과 철새도래지를 둘러보는 현장검증을 신청했다. 이흥남 군청 계장은 “보시다시피 갈대가 있고, 인공 습지를 갖춰놔 담수를 자연 정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민들은 “정화가 안 돼 바다가 오염됐다. 철새들도 고흥만을 떠나 보시다시피 휑하지 않느냐”고 맞받았다.

 현장재판 아이디어는 김진권(62) 서울고법원장이 냈다. 김천수(66) 어촌계장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재판을 받으러 서울까지 움직이기 어려웠다”며 “재판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직접 내려와줘 고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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