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은 그들만의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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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호 30면

“막이 오른다. 불이 들어온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다. 그리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사람들. 이들은 신속해야 하나 뛰지 말아야 하고, 이들은 원칙을 지켜야 하나 유연해야 하고, 이들은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하나, 꼼꼼해야 한다. 모순과 갈등 속에 최선책을 찾는 이들, 빛을 받지 않으나 열정으로 스스로 빛을 내는 이들. 이들은 대한민국 의전인(儀典人)이다.”

이 글은 최근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사진전 ‘프레임으로 들어온 의전인’에서 소개된 것이다.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는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국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과거엔 일방적으로 세계 질서의 영향을 받는 방관자였다면, 이제는 세계 질서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인 주체가 돼가고 있다.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핵안보 정상회의를 성공리에 개최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다자회의를 개최할 땐 치밀한 의전 행사 준비가 요구된다. 수많은 참가국의 일정과 순서, 요구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다양한 유관 기관들과 긴밀히 협조해야 거대한 행사를 치러낼 수 있다. 핵안보 정상회의만 봐도 53명의 수석대표를 위해 360여 대의 의전용 차량과 연인원 4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흔히들 의전을 형식적인 것, 혹은 국가 행사에만 필요한 특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전의 본질은 거대한 규모나 형식이 아닌 상식과 배려다. 의전은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는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급증하고 있다. 문화인, 교양인, 세계인이 동일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의전은 반드시 익히고 기억해야 할 요소다. 국가 의전 행사를 준비할 땐 크게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각각의 머리글자를 따서 3R로 지칭한다.

첫째, 상대방에 대한 존중(Respect)이다. 의전의 출발점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종착점은 다름을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것이다. 예컨대 술과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권 사람을 초청한 연회에선 술 대신 과일 주스를, 돼지고기 대신 할랄로 잡은 다른 고기를 내놓는다. 핵안보 정상회의(3월) 때 잉락 태국 총리가 추위를 느낄 것을 감안해 야외 공식 환영식에서 양국 정상이 외투를 입는 드레스 코드를 선택한 것이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왼손잡이임을 고려해 포크와 나이프 위치를 뒤바꾼 것은 ‘작지만 큰 배려’다. 상대방의 기호·기피에 맞춰 만남의 장소나 메뉴를 선택하고 상대방이 불쾌하게 여길 어휘나 표현을 배제하는 노력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 만남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둘째, 의전 행사 참석자들 간에 서열(Rank)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서열이 주는 딱딱한 이미지 때문에 이를 부정적으로 느끼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기준에 따라 정해진 서열은 오히려 참석자들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참석자가 적절히 예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게 이 원칙의 핵심이다. 국가 의전 행사에서 대사 간 서열은 부임 날짜 순서, 다자 국제행사에서는 알파벳 순서가 기본이다. 일상적인 만남에서도 모임 성격에 맞춰 적절한 서열 기준을 세우고, 테이블 자리 배치 등을 한다면 모임 초반에 생길지 모를 혼란과 불쾌감을 피할 수 있다.

마지막 원칙은 문화의 반영(Reflecting Culture)이다. 다양한 문화가 경쟁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의전에 문화를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외국 정상이 참석하는 연회 공연 프로그램에 전통 공연을 배치하고, 전통 의장대로 외빈을 맞이하는 게 그런 사례다. 하지만 이는 일방적인 문화의 주입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 문화도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한식 메뉴를 연회에 올리되 참석자들의 평소 식(食)문화를 반영하는 게 좋은 사례다. 상대방의 에티켓 또는 문화를 반영하고자 하는 창의적인 배려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요구된다.

의전은 멀리 있지 않다. 거창해 보이는 국가 의전 행사의 본질도 3R로 요약되며, 얼마든지 우리 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의전의 기본정신이자 우리가 배양해야 할 소프트파워다. 일상에서 의전을 친숙하게 여기고 가까이 하는 사람은 성공에 성큼 다가가 있는 사람이다.



배재현 1981년 외무부에 들어가 중국·홍콩·일본·베트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일했다. 문화외교국장, 주터키 대사 역임. 지난해 8월부터 외교통상부 의전장으로 국가 의전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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