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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희망의 날 세워 공포를 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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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진홍
논설위원

# 자전거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물건이다. 오로지 내 발로 페달을 밟아 나아가기 때문이다. 날이 궂고 추워져 자전거를 타기에 안성맞춤인 시기는 아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매 주말이면 어김없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10월 28일에는 서울 방배동 집을 출발해 동작대교 밑을 통과한 후 한강 남측의 둔치 위에 길게 이어진 자전거길을 따라 하남을 거쳐 팔당대교를 지나 옛 철로가 자전거길로 탈바꿈한 능내역과 북한강철교, 그리고 여러 개의 터널을 통과해 양평 군립미술관까지 나아갔다. 그 다음 주 토요일인 11월 3일에도 같은 코스를, 다만 반포대교를 건너 한강 북측의 둔치 위에 놓인 자전거길로 나아가 역시 양평까지 갔다. 한 주 뒤인 10일에는 양평역까지 자전거를 중앙선 전철에 태워 ‘점핑’한 후 양평에서부터 이포보~여주보~강천보까지 내달린 후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주 토요일인 17일엔 다시 양평에서 출발해 남한강 자전거길을 따라 충주까지 근 10시간을 내달렸다.

 # 강천섬을 휘감아 지난 후 섬강다리를 지날 즈음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하지만 어둠이 짙어질수록 섬강 다리 저편의 이름 모를 산 위에 걸린 아미 같은 초승달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가만 헤아려보니 음력 시월 초나흘 아니었던가. 그 가늘고 섬세한 달이 섬강 위에 아른거리며 비춰졌다. 정말이지 달과 산과 강이 짙은 어둠 속에서 절묘한 조합을 이루며 뭐라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취를 자아냈다. 낮의 그 어떤 풍광도 감히 비길 수 없을 만큼!

 # 페달 밟기를 멈추고 자전거에서 내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했다. 하지만 내가 지닌 휴대용 디지털카메라로는 어림없었다. 비록 카메라에는 담지 못했지만 내 마음의 렌즈에는 그 칠흑 같은 밤에 날 선 아미 같은 초승달과 봉우리마다 굵은 선의 윤곽이 뚜렷한 산의 자태, 그리고 달빛을 머금은 채 유유히 흐르는 강이 어우러낸 기묘한 정취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졌다. 물론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섬뜩한 공포가 엄습한 것도 숨길 수 없는 마음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 공포는 아미같이 날 선 초승달이 단칼에 베어내고 말았다. 너무 날이 서 베어도 피가 뿌리지 않는다는 전설의 월광참도(月光斬刀)가 번쩍한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 한편에 웅크리고 있던 공포를 순식간에 도려내고 대신 희망과 용기를 날 선 달빛 가득 담아 주었다. 그 덕분에 이제까지 내달려온 것보다 더 먼 길을 어둠과 공포에 굴하지 않고 질주할 용기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담대한 희망이 내 온 몸과 영혼에 번져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힘을 내 페달을 밟았다. 거침없이! 끝까지!!

 #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된 중국작가 모옌(莫言)의 작품 중에 『달빛을 베다(月光斬, 2006년작)』라는 것이 있다. 그 작품 서두에 공포와 희망이란 제하에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는 확실히 굶주림과 외로움, 그리고 공포 속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숱한 고난을 겪고 참고 견뎌야 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았거니와 타락하지도 않고 어엿한 작가로 성장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길고 지루한 암흑의 세월을 보낼 수 있게 지탱해 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 공포 속에서 희망은 마치 암흑천지 속의 불빛처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춰주고 아울러 우리에게 공포와 싸워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준다.”

 # 그렇다. 삶의 곳곳에 도사린 공포를 몰아낼 힘은 희망이다. 희망은 어둠의 공포만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마저 맞서 이겨낼 용기다. 물론 그 희망은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크든 작든 희망을 만들고 그 주인이 돼야 한다. 내 두 다리가 페달을 밟아 자전거의 두 바퀴를 밀어가듯이! 내 마음이 희망의 날을 세워 어둠의 공포를 베어내 한줄기 빛이 새어 나오도록 만들듯이!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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