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갚을 돈 121조 상환 연기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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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공적자금을 예정대로 갚기 어렵다는 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갚는 시기를 늦추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동안 상환 가능성에 대해선 언급하기 꺼리던 정부가 상환시기를 미루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쏟아부은 자금의 4분의 1도 거두지 못할 정도로 회수가 부진하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공적자금이란 성격상 1백%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함은 물론 회수한 돈으로 공적자금을 모두 상환할 수 있다는 환상은 깨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빚을 갚는 시기를 늦추는 방안에 대해 반대가 적지 않다. 원금이야 미룬다고 해도 이자 부담은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을 어떻게 갚겠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만기 연장이 이뤄지면 공적자금 회수 노력이 소홀해질 수도 있다.

공적자금 조성을 위해 발행한 정부보증채권의 이자는 현재 정부 재정에서 이자 없이 빌려다가 채권 소유자에게 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나가야 할 이자가 35조8천억원으로 원금의 43%다. 여기에 원금 81조9천억원 등을 합치면 총 1백21조7천억원을 상환해야 한다.

외국에서도 이자 부담이 결국 재정을 압박한 사례가 많다. 따라서 아예 회수가 가능한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을 분명히 따져 회수금으로 갚을 수 없는 부분은 재정에서 적극적으로 부담하자는 의견도 제시된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는 "정부 보증이 붙은 이상 예금보험공사나 자산관리공사가 갚지 못하면 정부가 갚을 수밖에 없다" 면서 "회수금으로 갚지 못할 것이 분명한 부분은 국채로 전환해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 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세연구원 박기백 연구위원은 "외국 사례를 볼 때 국채라고 해서 상환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며 "만기가 돌아온 공적자금을 국채로 바꾸면 오히려 재정을 악화시킬 수 있다" 고 주장했다.

◇ 공적자금 1백37조원 어디에 썼나=부실하지만 문을 닫으면 국민경제적 손실이 크거나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금융기관에 올 6월 말까지 53조원이 출자 형식으로 지원됐다. 출자를 하면 주식이 남지만 출자한 주식 중 13조3천억원은 금융기관이 부실해지는 바람에 이미 날아갔다.

부실 금융기관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순자산 부족분을 메워주는 출연으로 12조2천억원이, 예금대지급으로 20조원이 들어갔다. 금융기관이 문을 닫았지만 예금 보장을 받은 사람은 외환위기 이후 올 3월까지 1백17만명으로 이들이 20조원을 나눠가졌다.

재경부 추정에 따르면 투입된 공적자금 중 29조7천억원(21.6%)이 대우그룹과 관련한 손실을 메우는데 쓰였다.

이밖에 미래의 채무상환 능력까지 따져 부실채권을 판정하는 바람에 금융권 부실채권이 26조원 이상 늘어났다. 빈약해진 금융기관의 재무제표를 공적자금이 메운 셈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외환위기 이후 겪을뻔한 공황상태를 막아 약 6백조원의 경제적 이득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6월 말 현재 공적자금 회수율은 24.8%에 불과하다. 금융기관 출연금 12조2천억원과 퇴출금융기관 예금 대지급금 20조원은 상당부분 손실이 예상된다. 정부가 보유 중인 금융기관 주식을 팔면 회수율이 높아지겠지만 주식시장이 어렵고 주가가 낮아 쉽지 않다.

◇ 더 필요하지 않나=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현재로선 약간 모자랄지 모르나 회수금으로 충분히 꾸려갈 수 있다" 고 말했다.

6월 말 기준으로 공적자금은 20조4천억원이 남아 있는데 서울보증보험에 대한 출자나 보험사 구조조정 등 이미 용도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기업부문에서 추가적인 대규모 부실이 생기면 공적자금이 부족해진다. 매각 협상이 진행 중인 현대투신에 넣어야 할 5천억원은 2차 공적자금 산정 당시 잡히지 않은 돈이다.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는 "시장불안 요인으로 꼽히는 하이닉스반도체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금융권이 대손충당금을 추가로 3조원 더 쌓아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해당 금융기관이 영업이익 등으로 감당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공적자금이 많이 필요하진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상렬.서경호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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